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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행성, 일본원정을 위해 원나라가 설치한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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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행성, 일본원정을 위해 원나라가 설치한 기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은 원나라가 고려를 복속한 후에 설치한 출선기관으로 일본 원정을 준비하였다.

흔히 정동행성이라고 줄여서 부르며, 일본행성(日本行省)·정동성(征東省)으로도 불렸다.

 

개요

 

쿠빌라이는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

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출병

한다(원나라의 일본 원정).

 

1274년 제1차 일본 원정에서 대마도,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데에서 그친 원나라의 세조(世祖)는 1280

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하고 제2차 일본 정벌을 준비하여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하자, 1282년(충렬왕 8년) 드디어

폐지하였다.

 

그 후 제3차 정벌 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1283년(충렬왕 9년) 다시 설치했다.

 

원래 일본 정벌은 고려-원 연합군으로 시도하였으므로 충렬왕이 정동행중서성의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행중서성사

(行中書省使)에 임명되었다.

 

일본 정벌이 포기된 후에도 그대로 존속되어 공민왕 때까지 남아 있었다.

고려 국왕은 원나라로부터 정동행성의 좌승상직 또는 우승상직을 받았으나 정동행성은 형식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원나라는 고려를 직·간접적으로 지배를 하면서 정동행성을 통하여 고려에 간섭하려고 했으나 고려 군신의 반대에 봉착

하여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70여 년간 존속된 정동행성은 원나라의 쇠퇴와 고려의 국권 회복 운동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공민왕 5년(1356년) 당시 정동행성의 대표기관인 이문소(理問所)를 혁파함으로써 정동행성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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