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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붉은 갑옷을 입고 용맹하게 왜군을 무찌른 홍의장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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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붉은 갑옷을 입고 용맹하게 왜군을 무찌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 1552년 8월 28일 ~ 1617년 4월 10일)는 조선 중기의 무신, 정치인, 군인으로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의병장이다. 34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문장의 글귀가 왕의 귀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벼슬에는 오르지 못하고, 40세가 넘도록 고향에서 학문과 낚시질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관군이 일본군에게 전멸당하자, 당시 고향인 경남 의령에서 스스로 의병을 조직, 붉은 비단으로 된 갑옷을 입고 활동하여 천강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그의 용맹성에 놀란 왜병들은 곽재우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했다 한다.

여러번 승리한 공로로 찰방, 조방장 등을 지낸뒤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김덕령 등의 의병장이 무고로 희생되는 것과 영창대군의 죽음을 보고, 벼슬을 여러번 사퇴하였다. 당색으로는 북인이었으나 광해군 집권기에도 여러 번 관직을 사퇴하거나 사양하였다. 인목대비 폐모론에 이어 1613년(광해군 5년) 영창대군에 대한 사형 여론이 나타나자 영창대군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리고 낙향, 이후 창녕 망우정에 은거하였다. 본관은 현풍(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으로,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경상남도 의령 출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자 그의 외손녀사위이다. 대제학을 지낸 김우옹(金宇顒)과는 동문이자 동서간이 되었다. 전란 중 스스로 천강홍의장군을 자처하였으며, 전장에 나설 때 붉은 갑옷에 백마를 타고 다녔으므로 그의 이름을 모르던 장졸과 백성들로부터 홍의장군이라 불렸다.

 

출생과 가계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출신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을 지내고 사후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된 곽지번(郭之藩)의 손자이고, 수(守)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과 진주강씨의 셋째 아들로 유곡면 세간리에서 태어났다. 친형제로 곽재희(郭再禧), 곽재록(郭再錄)과 누이 1명, 계모 허씨에게서는 이복동생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祺)와 이복 누이 1명이 더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출신 곽경(郭鏡, 1117 - 1179)으로 송나라 팔학사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동래한 귀화인이었다. 곽경은 1138년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하고 포산군(苞山君)에 봉군되었다. 5대조 곽안방(郭安邦)은 세조조에 해남현감(海南縣監), 익산군수(益山郡守)를 지내고 1467년(세조 12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데 가담하여 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세조대의 청백리였다. 고조부 곽승화(郭承華)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나 진사였고, 할아버지 곽지번이 성균관사성에 올라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수학과 소년기

일찍이 생모 진주강씨를 여의고 아버지 곽월은 허씨와 재혼하였다. 일찍이 영남의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며, 후에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되었다. 함께 동문수학한 김우옹 역시 스승 조식의 외손녀사위가 됨으로써 동서간이 되었다. 그 뒤 상경하여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그의 재주를 눈여겨보던 조식은 자신의 문도들과, 외조카 이준민(李俊民)이 한성부에 다녀오면 반드시 그의 소식을 묻곤

했다.

 

청년기

그 뒤 진사시에 응시하였으나 진사시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북인 당원이었으나 비주류였던 탓에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성리학(性理學)을 알지 못하여서 진사시에 들었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고 혹평해놓기도 했다. 1585년(선조 18년) 과거를 보아 별시문과(別試文科)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으나, 지은 글이 선조의 비위를 거스른 까닭에 급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격이 취소되어 낙방되고 만다. 그 뒤 정계에 진출할 뜻을 포기하고 40세가 넘도록 학문 연구와 농사를 지으며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조식의 문하생들이 대부분 김효원이 한때 조식의 문하에 있었던 인연으로 동인(東人)에 가담하면서 그도 동인의 당인이 되었다가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당될 때는 북인의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동인과 북인 내부의 내분을 못마땅히 여기던 그는 이산해 등 다른 북인 당원들을 피하거나 일부러 멀리하였다. 그는 고향인 현풍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근검절약했는데,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재물을 늘려 재산이 몇 만 금이나 되었다. 그러자 시골 사람들이 그가 비루하고 인색하다고 의심하였으나, 곽재우는 태연스레 지내면서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계모 김해허씨가 창녕군 화왕산성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잠시 울진으로 가 있기도 했다.

 

전란 초기

평생 은거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1592년(선조 25년) 음력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의 의주(義州)로 피난 소식이 날아오자, 같은 달인 음력 4월 22일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옷으로 철릭을 해 입고, 이불에 "천강 홍의 장군"(天降 紅衣 將軍)이라 적어 깃발을 만들었다. 그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 활동으로 의령·창녕(昌寧) 등지의 산악에 매복하고 있다가 신출귀몰하며 일본군을 물리치고 일본군의 호남 진격을 저지하였고, 일본 보급선을 기습하여 보급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만든 군복을 입고 아군의 맨 앞에서 싸웠기 때문에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였다. 1592년 5월 함안군을 함락, 점령하고 정암진(鼎巖津, 솥바위나루) 도하 작전을 전개하는 왜군과 교전,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붉은 비단으로 된 옷을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도 불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을 자처하였고, 기습과 매복이 성공을 거두어 관군도 이기지 못한 왜군을 격파하면서 유명인사가 된다.

 

왜군이 부산에서 진주를 거쳐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왜군은 정암진 나루에 도착했다. 곽재우는 이때 정암진 언덕에 병사들을 매복시킨 뒤 날랜 병사 몇명을 선발, 남강을 건너는 왜군을 늪지대로 유인한 다음 화살공격으로 전멸시켰다. 왜군 정찰대는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부대의 통행이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통과할 수 있는 지점 근처에 나무 표시 등 표식을 만들었다.

곽재우는 왜군 정찰대의 행동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가 밤에 표지목을 늪지로 옮겨 꽂고, 표식들을 늪지로 향하게 바꾸어 놓았다. 다음날 왜군이 잘못 표시된 표지목과 표식들을 따라가다 늪지에 빠지자 곽재우는 언덕에 숨어있던 병사들에게 공격령을 내려, 기습 공격을 가해 왜군을 몰살시켰다. 여기에서 2만 명의 일본군이 정암진 늪에 빠져 사망하였다. 관군의 패배와 그의 연전연승은 자주 비교되었고, 관군들 중에는 그를 시기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왜적을 피해 달아났던 감찰사 김수와의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에 누명을 쓰고 체포, 구금되었다가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김성일(金誠一)이 사정을 알고는 김성일의 특별 건의로 석방된 후,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그의 의병 활동의 공을 높이 사 같은 해 음력 7월에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에 임명되었다가 비변사의 추천으로 5품직에 제수되어 바로 형조정랑이 되었다.

 

1592년 음력 10월에는 당상관으로 승진, 절충장군(折衝將軍) 겸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하였고, 10월말에는 무관 품계에서 문관 품계인 통정대부(정3품)로 변경, 임명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고, 음력 12월에는 다시 성주목사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1593년말 조정의 명을 전달받고 삼가(三嘉), 의령(宜寧), 단성(丹城), 고령(高靈) 및 낙동강 일대를 방어하고 무너지거나 파괴된 성곽을 보수, 수리하였다. 성주목사로 재직 중 삼가의 악견산성 등 성지 수축에 열중하다가 그해 12월말 진주목사에 임명, 전근되었다. 곧 경상우도조방장을 겸임되었고, 1595년 초 진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일시 휴전으로 임진왜란이 종식되자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로 돌아와 다시 은둔 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가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루머가 확산되면서 모함을 받고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체포당하기도 했으나 죄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곽재우와 절친한 사이인 의병장 김덕령은 끝내 이몽학의 난과 관련된 누명을 벗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곽재우는 스스로 사퇴하였는데, 이 일로 곽재우는 사실상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되었다. 전황 중에도 그는 꾸준히 서신을 작성, 조정에 장계로 보내 전황을 보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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