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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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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분서갱유와 폭정, 대토목공

분서갱유

기원전 213, 함양궁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시황제의 나이는 46세로 절정기였다. 연회도중 박사 순우월봉건제와 군현제를 놓고 복야 주청신과 언쟁을 벌였다. 이 때, 순우월이 봉건제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승상 이사는 30일 내에 진나라의 역사와 의술, 등에 관한 책 이외의 모든 책들을 태워버리라 주청올렸고,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본원적으로 봉쇄하기위해 시황제는 이를 받아들여 실행시켰다. 이것이 바로 분서(焚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2, 시황제는 방사 후생노생에게 불로장생의 약을 가지고 오라 명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은 시황제를 부덕을 비판하며 도망쳐 버리자 화가 난 시황제는이들을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 수가 460여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이다. 이를 모두 합쳐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불렀다. (분서갱유는 원래 단지 책을 압수하거나 학자들을 단속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제국 성립후 유학자들이 한제국의 성립의 명분성을 위해서 확대했다는 설이 있다.) 이에 분개한 황태자 부소가 시황제에게 간언했으나, 부소는 오히려 시황제의 분노를 사 대장군 몽염이 있는 국경 근교로 유배되었다.

 

대토목공사

시황제는 북방에 흉노의 침입을 염려하여 대장군 몽염에게 서쪽으로 임도로부터 동쪽으로 요동까지 그 유명한 만리장성을 쌓도록 명했다. 이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가 150만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 하였다. 또한, 시황제는 함양 근교에 아방궁을 쌓도록 하였고70만 명의 인부를 동원, 함양 근교의 여산 전체에 자신의 능묘를 건설토록 했다. 이런 대토목공사를 하는 동안, 국가의 재정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법을 매우 엄히 하여 백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하였으며, 한 사람이 죄에 연루되면 그 삼족을 몰살시켰고, 나아가 한 집이 법을 어기면 그 마을의 모든 가구들도 그에 똑같은 형벌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관청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죄인들의 행렬이 즐비했다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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