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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을사늑약에 저항한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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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을사늑약에 저항한 의병장

 

의병장 종교 유교 부모 아버지 최대(崔岱) 최익현(崔益鉉, 양력 1834년 1월 14일 / 1833년 음력 12월 5일 ~ 1907년 1월 1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 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을사늑약에 저항한 의병장이다. 김기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동부승지, 참의, 돈녕부도정 등을 역임했고 안동 김 씨 세도정치에 반대,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74년 흥선대원군을 공격하여 실각시켰다. 그 뒤 의정부 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정인홍,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김평묵과 함께 결사반대하여 좌절시켰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개항이 불가(開港五不可)의 '병자 척화도'(丙子斥和疏)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늑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란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 하였다. 하지만, 단식의 후유증으로 3개월 뒤의 발병으로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1928년 시호 없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노론 화석학파의 지도자이자 노론 내 위정척사파의 중심인물이었고, 1905년 을사조약에 저항한 의병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본관은 경주이고, 초명은 기남(奇男), 자(字)는 찬 겸(贊謙), 아호는 면암(勉庵)이다. 김기현, 이항로의 문인이다.

 

사상과 신념

최익현의 위정척사론은 어디까지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중화사상의 테두리 속에 머물러 있어 중국으로부터의 완전 이탈이나 성리학적 윤리질서의 개조란 용납될 수 없었다. 러므로 그에게는 개화된 일본도, 금수시(禽獸視) 하는 서구 각국과 다를 바 없었으며, 또한 그는 동학 농민 운동의 농민군과 동학도들을 도적이라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 왕조 질서를 뒤흔들려는 동학(東學)도 '동비'(東匪)로밖에 간주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대한 제국의 수립을 반대하였다. 조선의 국왕이 대한 제국(大韓帝國)의 '황제'(皇帝)로 격상되는 것을 옳게 여기지도 않았다.

대원군 월권행위 비판

국왕의 생부로 집권해온 대원군의 강력 정치와 월권행위를 비판, 대원군이 남인북인을 등용하는 것 역시 정사를 어지럽히는 행위라 보고 대원군 집권 명분의 정당성이 없음을 들어 탄핵, 실각시켰다. 이때 '봉명조양'(鳳鳴朝陽)이란 찬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도 대원군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한직으로 전임되었지만 한때 '왕실의 골육을 이간시킨' 죄목으로 2년간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기도 하였다.

 

단발령 반대

그는 갑오개혁단발령 당시 나라가 망하는 것이라며 저항하였다. '5백 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니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 또한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충의(忠義)의 혼이 되는 것만 같겠는가'라며 갑오경장 등에 저항한다. 또한 단발령 당시 그는 '두 가 단(頭可斷)이나 발부가 단(髮不可斷)'이라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단식과 최후

1906년 6월 13일 조정으로부터 궁내부 특진관에서 해임되었다. 6월 14일 끝까지 남아 있던 최익현 이하 임병찬, 고석진, 긴 기술, 문들 환(文達煥), 임현주(林顯周), 이종규, 조우석(趙愚植), 조영선(趙泳善), 최제학, 나 기덕(羅基德), 이용길, 유해용(柳海瑢) 등 13인의 의사들은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최익현의 의병 항전은 종말을 고하였다.

6월 말 최익현은 이들과 함께 다시 경성부로 압송되어 경성 주재 일본군 사령부에 감금당하였다. 최익현 이하 13인의 의병장들은 여기서 그들의 심문과 회유를 받는 동안에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음모의 죄상을 성토하였다.

 2개월간 일본군 사령부에 감금된 끝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그해 8월 하순 일본의 쓰시마 섬 염원(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되어 감금되었다.

그곳에는 홍주의 병진의 유중근(柳濬根), 이식(李 식) 등 의병 9인이 이미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최익현은 일본 정부 측의 갖은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최익현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임병찬에게《유소(遺疏)》를 구술, 다음과 같은 여한(餘恨)을 남겼다.


 “신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 년 화하정도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강제로 그의 입에 음식을 넣었으나 모두 뱉거나 입을 열지 않고 저항하였다. 1907년 1월 1일 쓰시마 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시신의 운구와 장례식

최익현의 유해는 1월 5일 쓰시마에서 배편으로 경상남도 동래부 초량(草梁)에 닿았다. '춘추대의 일월 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 8자의 만장(輓章)을 앞세운 그의 영구(靈柩)는 연도에 수많은 인파가 늘어서 애도하는 가운데 구포, 성주, 황간, 공주 등지를 거쳐 1월20일청양의 본가에 도착, 무동산(舞童山) 기슭에 묻혔다. 1907년 논산군 상월면의 국도변에 안장했다가 뒤에 예산군 관음리로 이장했다. 문집으로는 《면암 집》, 면암 속집 등이 있다.

사후

묘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관음리에 있다. 최익현의 대의비인 춘추대의 비(春秋大義碑)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땅에 묻혔다가 해방 후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다시 세워졌다.1928년 이왕직에 의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러나 시호가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논란거리가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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