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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 사유, 미천왕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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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원왕, 사유, 미천왕의 아들

 

고국원왕(故國原王, ? ~ 371년, 재위: 331년 ~ 371년)은 고구려의 제16대 국왕이다. 이름은 사유(斯由) 또는 쇠(釗)라고 하며 미천왕의 아들이다. 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한다. 369년 백제를 공략하려다가 패하였고 371년의 2차 백제 공략에서 전사하였다.

 

 

생애
314년에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331년 음력 2월에 미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34년에 평양성을 증축하였고, 335년에는 신성(新城)을 쌓았으며, 342년에는 환도 성과 국내성을 증축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전연(前燕)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東晉)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전연과의 전쟁
오호십육국 시대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의 수장 모용외(慕容廆)가 333년에 사망하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이 모용부의 대인(大人)이 되었다. 모용황의 아우인 모용인(慕容仁)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고국원왕은 336년에 망명해온 갑충(郭充)과 동수(佟壽)를 맞아들였다. 338년에 전연과 후조(後趙)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자, 후조와 내통하였던 봉추(封抽)·송황(宋晃) 등이 망명을 요청해 그들을 받아들였다.

339년에 전연히 쳐들어와, 신성에 이르렀다. 고국원왕이 동맹을 청하자, 전연은 물러갔다. 이때 맺은 동맹 관계에 따라 340년에 전연에 조회하기도 하였다. 342년 겨울에 모용황(慕容皝)은 용성(龍城)으로 천도한 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다. 모용황은 왕우가 이끄는 1만 5천의 소수 군대를 평탄한 북쪽 길로 보내고, 자신은 한수와 함께 5만 대군을 이끌고, 험난한 남쪽 길을 택해 공격하는 기만전술을 썼다. 하지만 이를 알아채지 못한 고국원왕은 북쪽으로 왕제 무(武)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자신은 소수의 군대로 남쪽을 지켰다. 결국, 남쪽 전투에서 크게 패한 고구려군 중에서 장군 아 불화도가(阿佛和度加)가 전사하고, 환도성이 함락되었으며, 고국원왕은 단신으로 단 웅곡(斷熊谷)으로 피신하였다.

고국원왕을 추격한 전연군은 모후 주 씨(周氏)와 왕비를 포로로 잡았으나, 북쪽 길에서 고국원왕의 동생 무(武)의 군대를 만나 크게 패하여 퇴각하였다.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고구려 백성 5만 명을 잡아갔을 뿐만 아니라, 고국원왕의 부왕(父王)인 미천왕의 미천 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까지 가져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343년에 고국원왕은 동생 무(武)를 보내 전연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부왕(父王)인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며, 그 해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345년에 전연히 모 요각(慕容恪)을 보내 남소(南蘇)가 함락되었으며, 349년에는 전연의 망명자였던 송황(宋晃)을 전연으로

송환하였다.

355년에 고국원왕은 전연에 간청하여 모후 주 씨(周氏)를 돌려받는 한편, 전연으로부터 정동 대장군 영주 자사 나랑 공 고구려 왕(征東大將軍 營州刺史 樂浪公 高句麗王)에 책봉되었다. 이후 전연은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멸망하였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 편(慕容評)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 우호관계를 수립하였다.

 

 

백제와의 전쟁
369년에 백제가 마한을 정복하러 간 틈을 타, 고국원왕은 보·기병 2만 명을 이끌고 치양성(雉壤城, 현 황해 남도 배천군, 구 모로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의 말 말굽을 상하게 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달아났던 백제인 사기(斯紀)가 다시 백제에 투항하여, ‘고구려의 군사가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 채운 허세일 뿐,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라는 고구려의 군사정보를 백제의 근구수 태자에게 알려주었다.

이로써 고국원왕은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백제에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황해도 신계군)까지 영토를 내주고 말았다.

371년에 고국원왕은 복수를 위해 군사를 일으켜, 백제로 재침공하였다. 하지만 패하(浿河; 대동강) 강가에 군사를 매복한 근초고왕이 기습적으로 공격하자, 고구려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기세를 탄 근초고왕은 동년 10월에 정예 군사 3만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진격해 왔고, 고구려군은 이를 어렵게 물리쳤으나, 고국원왕이 전사하고 말았다. 고국원왕은 고국(故國)의 들[原]에 장사지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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