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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사후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이 묻혀지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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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사후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이 묻혀지게 되다.

 

남이의 옥사 전후
1468년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조가 신숙주를 당 태종의 위징에 비견한 것은 자신도 당 태종처럼 신숙주를 통해 문화 통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숙주를 신뢰했다는 뜻이 된다.

1468년 세조가 병으로 죽고 예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신숙주는 한명회, 구치관, 정인지 등과 함께 원상(院相)의 한사람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정희왕후와 함께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예종 즉위 후 남이의 옥사가 발생하자 그는 유자광 등과 함께 위관으로 참여, 남이 장군과 강순 등을 심문한 뒤 숙청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의경세자 장이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고 사가로 나가게 된 수빈 한씨(후일의 인수대비)는 자신의 일족인 한명회 외에 그의 집에도 자주 왕림하였는데, 그는 수빈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 혈(훗날의 성종)을 눈여겨보게 된다. 의경세자가 병으로 죽자 현덕왕후의 저주로 죽었다는 소문이 각지에 확산되자, 그는 이를 근거없는 헛소문이라며 일축하였다.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일찍 사망하였으나 현덕왕후의 저주로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소문은 계속 확산되었다.

 

성종 즉위 직후 

1469년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죽자 그는 정희왕후에게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 혈을 왕으로 추천했다. 정희왕후가 자을산군으로 후계자를 결정하였을 때 귀성군을 추천하는 반대 의견이 나오자 그는“속히 상주(喪主)를 정하여서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여 정희왕후의 결정을 적극 지지한다. 1469년 예조판서 대리, 겸 춘추관 영사(兼春秋館領事)를 지냈다. 그는 1467년부터 오래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그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자신의 신념처럼 여겼다 한다. 명나라와 여진족, 일본, 유구국 등에 보내는 표전(表箋)과 사명(辭命) 문건을 모두 그가 직접 최종 검토를 하였다. 외교업무를 맡으면서도 오히려 주는 것은 후하고 받는 것은 적어서 국내 사람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상대 외교국으로부터는 언제나 환심을 얻었다.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 말로는 쉬운 일 같지만 실상은 어려운 것이다. 오직 지극한 정성만이 남을 감동시킬 수 있다. 정성을 쏟지 않고, 진심이 없는데 어찌 상대방을 감동시키겠는가? 중부(中孚)의 신(信)도 열심히 믿으면 돼지나 물고기에게까지도 감동을 줄 수 있다 하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영향이 미치지 못하겠는가?"

 

사람들은 그를 외교의 달인이라며 칭찬하였지만, 그는 사람을 사귀는 것과 비위를 맞추는 것을 예로 들며 외교든 대인 접빈이든 쉽지 않음을 토로하였다. 1469년(성종 1년) 12월 29일 왕명으로 한명회, 구치관, 최항, 조석문(曺錫文), 김질 등과 함께 경연청 영사(經筵廳領事)를 겸임하였다.

 

서적 편찬과 영의정 재임

성종이 즉위하자 그를 추대한 공로로 1471년(성종 2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노병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윤허를 받지 못했으며, 이후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계에 남아 있었다. 신숙주는 병력 1만 이상을 증강하도록 건의하여 병력을 양성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힘썼다.

훈구 공신의 지위에 있었으나 공신과 훈구파의 세력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신숙주는 평생 사치스럽게 행동하지 않았고,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위세를 부리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세인들의 칭송과 덕망높은 인물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의 검소함과 겸손함은 묻혀지게 된다. 그러나 김시습만큼은 그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의 가마나 교자 행차 시에 나타나 욕설과 조롱을 퍼붓고 야유를 보냈다. 신숙주의 하인들이 김시습을 제지하려 하였으나 그는 하인들을 나무라며 만류하였다. 그는 마포의 한강변에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문인, 시인들과 교유하였다. 또한 서실을 짓고 문인들에게 글과 사서육경, 역사와 고전 등을 가르치는 한편 그림에도 능하여 그림과 서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서실에는 많은 글과 학문, 그림, 서예를 배우고자 하는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는 사육신과 생육신은 단종에게는 충신이지만 세조의 입장에서는 충신이 아니며 개인에게는 충신이지만 국가의 백년대계를 봤을 때는 옳은 행동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한편으로 동료 공신들의 전횡을 눈여겨보면서 그는 공신들의 영화가 영원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자신의 손자 신용개를 김종직에게 보내 수학하게 했다.

 

영의정 재직 중 최후

1473년 충훈부 당상(忠勳府堂上)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鄭眉壽)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1474년(성종 4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1474년 4월 24일 공혜왕후의 국상 시 국장도감 도제조(國葬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그해 6월까지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1475년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계속 영의정직에 있었다. 왕이 그에게 특별히 궤장과 안대를 하사하려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궤장을 받을 나이는 아니라며 조용히 사양하였다. 한편으로 일본과 여진을 경계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주력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임종 직전에 문병 온 성종이 조언을 묻자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서예로도 재능을 발휘해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그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고》 등의 작품을 남겼다. 많은 시와 다양한 저작과 작품을 남겼으나 후일 사림파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되면서 그의 저서와 작품, 시, 글씨들 중에는 중종 때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다수 소각되거나 인멸되었다. 또한 그가 사후 변절자, 배신자로 매도당하면서 그의 작품과 저서, 시, 그림 등은 대부분 외면당하고 말았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저서인 《보한재집》(保閑齋集), 《북정록》(北征錄), 《사성통고》(四聲通攷), 《농산축목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등이 있고, 글씨로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의 찬문(贊文)과 해서체의 작품 《화명사예겸시고 (和明使倪謙詩稿)》 등이 현전한다. 특히 《보한재집》은 1644년(인조 22년) 신숙주의 6대손인 신숙(申洬)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문집의 완질을 빌려서 모사한 것이 전한다.

 

사후

사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현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에 안장되었으며 부인 무송군부인 무송윤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후일 그의 자손들 묘소도 근처에 조성되면서 묘역이 되었다. 묘비문은 이승소(李承召)가 썼고, 신도비문은 정난종(鄭蘭宗)이 찬하였다. 이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문충(文忠)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충북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九峯影堂), 청주시 낭성면 관정리의 묵정서원(墨井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보사공신, 좌리공신 등에 책록되었으므로 성종은 그에게 부조지전을 내려 불천지위가 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1445년경 명나라 화공에 의해 그려진 저본설색에 견장족자로 된 영정과 15세기 후반, 사망 직후에 그려진 영정, 1445년 명나라화가본 및 기타 영정들을 참고로 그린 1749년본 영정 등이 전한다. 1445년경 명나라 화공본 영정은 현 청주시에 위치한 구봉영당에 봉안되어 있다가 1970년 이후 공개되었고, 모사본은 묵정영당과 고잔묘 등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 중 1445년에 명나라 화가가 그린 원본 신숙주 영정은 1977년 11월 15일 대한민국 보물 제 61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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