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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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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4)

 

세자 책봉 문제

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배극렴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 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 또한 다른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도 자신들을 배제하고 후처인 강씨의 아들막내 방석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정도전은 바로 세자시강원이사의 한사람이 되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했다.

 

국방력 강화와 명나라와의 갈등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高麗國史)를 편찬하였다. 조선 창업에 성공한 정도전은 세자책봉에 이은 새나라 문물과 제도정비에 착수했다. 6월에는 국가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담은 《경제문감》,《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업무와 인사 행정 및 실무를 논하였다.

이어 국방력 강화와 고구려 고토수복을 위한 공병제도를 도입 군의 통수권을 국가에 귀속 시키기 위한 사병을 혁파하였다. 또 조세수급의 안정을 통하여 국가 재정의 건전성 확보하기 위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과전법을 단행하는 등 일소에 혁신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해 태조는 그의 상소를 수용하는 것을 머뭇거렸고,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1395년 3월에는 다시 판삼사사로 복직했다. 1395년 일부 반발 세력에 의한 국가기밀 누설로 인하여 갈길 바쁜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신흥국 조선의 일신을 경계하였던 명나라의 황제 주원장은 조선의 정조표전(正朝表箋) 문구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문하시랑찬성사를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되었다.

 

한성부의 도시 정비

천도가 확정, 단행될 무렵 그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394년부터 2년간 그는 한성부의 도시 정리를 추진했다. 1395년(태조 4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으며, 총책임자는 정도전이 되었다. 1396년부터 성곽을 쌓기 시작 1년여 만에 완성했다. 백악산 꼭대기를 기점으로 하여 동쪽으로 한성부 시내를 돌아 백악에 이르는 성곽은 총길이 5만 9천 5백 자, 그 중 토성이 4만 3백여자, 석성이 1만 9천 2백 자, 높이 40자 2치로 정도전은 이 수치를 정확히 계산, 파악했으며, 공사기간은 여름과 겨울로 농번기를 피해 2기로 나누어 공사를 벌였다. 공사는 2년만에 완공되었다.

 

이방원과의 갈등

정도전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동의 장량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게 아니라 거꾸로 장량이 한 고 조를 이용했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의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정몽주 등을 제거한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임금은 세습되는 직책이라 어리석고 멍청한 임금이 나올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은 후일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더불어 세자 방석도 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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