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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교육진흥운동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만주로 망명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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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 늑약 체결 이후 일본의 국권 침탈이 차츰 가시화되자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여 1906년 10월,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을 하여 전 재산을 처분하였다. 한편 그는 서전서숙의 교장으로 이상설을 초빙하여 동지획득과 교포교육에 주력하게 했다.1907년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 을사조약 체결의 억지, 강압성을 폭로하려는 계획을 세워 고종에게 건의하였다. 고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헤이그로 밀사를 보내지만 일본의 조선통감부 경찰에 적발되면서 이는 고종의 퇴위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을 만주로 파견했다. 그러나 자금난과 일제의 간섭으로 서전서숙은 1907년 10월경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뒤 헤이그 특사로 갔다 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1908년초 비밀리에 만주에 다녀오다. 1908년 이상설과 운동방책을 협의하여 이상설은 국외에서 활동하고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평양 대성학교, 안동 협동학교, 정주 오산학교 등 각 학교에 파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다.1908년10월 18일 경성부의 상동교회에서 한산 이씨 이은숙(李恩淑)과 재혼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신식 결혼 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후일 계비 이은숙은 자서전 《서간도 시종기》를 남기기도 했다.

 

만주 시찰과 망명 

1909년 그는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 이동녕, 주진수(朱鎭洙), 안태국, 양기탁, 윤치호, 이승훈, (李昇薰),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김도희(金道熙) 등과 함께 신민회 간부 총회의를 소집하여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류허 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를 후보지로 결정했다. 1910년 7월 이동녕, 장유순, 이관직과 남만주 시찰후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구상하고 되돌아왔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12월, 6형제는 조선 안의 명성을 포기하고 겨울에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했다.

이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이 넷째였던 이회영이라 한다. 이때 국내에 있던 재산은 처분하였으며, 대가족이 함께 만주로 이주했다. 이상룡, 허위의 집안과 함께 기득권을 버리고 온 가족이 독립 운동에 나선 대표적인 가문이다. 이회영 일가는 지린에 정착하여 경학사, 신흥강습소를 설치하고 독립 운동을 위한 기반 닦기에 들어갔다. 당시 위안스카이가 이회영 일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한인 토지 매매를 후원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도 남아있던 가솔과 노비를 해방하였으나, 수행을 자청한 일꾼까지 합하여 40여명도 그들 일가족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그가 출국한 직후 신민회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만주의 군관학교로 보내기로 결의한 사실이 일본의 정보망에 접수되고, 자금을 모금하던 안명근의 행보가 탄로나면서(안악 사건 참조) 무관학교 설립에 차질을 빚게 된다. 만주 통화현 광화진의 합니하 강가에 일시 정착하며,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주변 황무지를 개간하며, 국내에 잠입하여 모금활동 등을 하는 등 독립운동가 양성 기지 건설에 매진했고, 1911년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최초의 재만한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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