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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고종 망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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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아들 이규학(李圭鶴)이 고종황제의 조카딸과 신부례를 올리는 기회를 엿보아 고종 망명을 시도하였다. 비록 망국이기는 하나 궁중의 신부례는 매우 장엄하고 절차가 복잡하여 축제분위기였다고 한다. 이 기회를 틈타 고종과 비밀리에 접촉하는데 성공했고 민영달은 이 거사에 5만원의 자금을 내 놓았으나 고종의 갑작스러운 망으로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1918년에 이르러 고국에서 가지고 온 독립운동 자금이 바닥나게 되자, 이회영은 그의 형제들에게 신흥무관학교 운영을 맡기국내로 다시 잠입하였다.

 

고종 망명 계획 시도와 실패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 소식을 접하고 자극, 이때 국내·외에서의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그는 오세창(吳世昌), 한용운(韓龍雲), 이상재(李商在) 등과 만나 밀의한 뒤 고종의 망명을 계획한다. 그는 시종원 시종(侍從)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승락을 얻었으며 그 뒤 김가진 등과도 비밀리에 연락하여 고종의 중국 망명을 도모하지만, 1919년 1월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국내에서 가지고 온 자금이 바닥나면서 가족들은 극도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나, 이회영은 블라디보스토크,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돌며 독립 운동을 계속했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때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내에 지휘를 놓고 서로 다투거나 분쟁이 일어날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회의에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이회영의 예상은 적중하였고 이때부터 이미 독립 운동단체 사이에 내분과 조직간의 알력이 심화되고 있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결국 의견의 차이로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갔다. 그해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1년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때 신채호와 함께 조정 역할을 맡았다.

이해 4월에 유자명은 이회영을 만났는데, 이미 이회영은 일본의 유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의 저술을 읽고 감명을 받은 후였다.임정이 창조파, 개조파, 임정 고수파로 나뉘자 그는 임시정부를 떠났다. 1923년 중국 후난 성(湖南省) 한수이 현(漢水縣)에 토지를 매입하고 한중합작 이상농촌인 양도촌(洋濤村) 건설을 추진하였으실패했다.

 

임정 탈퇴와 아나키즘 활동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관여했다. 1925년에는 비밀 결사 조직인 다물단을, 1931년에는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합작으로 독립 운동 단체인 항일구국연을 결성하여 의장으로 취임하기도 했고, 행동대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활동,일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1924년 4월 20일에 베이징에서 화암 정현섭, 우근 유자명, 회관 이을규, 우관 이정규, 구파 백정기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기관지인 정의공보를 비밀리에 발행하였는데, 그 잡지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28년 5월 상하이에서 이을규, 정규 형제 및 정화암, 류기석등의 동지와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1928년 6월 1일에 정의공보를 복간하는 의미로 탈환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였고 더 적극적으로 아나키즘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1927년 9월 하순, 시야 김종진은 북만으로 떠나기전 톈진에서 이회영을 찾아가 사상적인 담화를 하였는데 그 대담의 기록이 남아있다. 이 대담에서 크게 감화를 받은 김종진은 그의 사촌인 백야 김좌진 장군을 설득하여 신민부와 아나키스트와의 연대를 받아들였다. 김좌진 장군은 철저한 대종교신자이자 민족주의자이므로 아나키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아나키스트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1928년 7월 아시아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자, 무정부주의자연맹 창립 대회에 '한국독립운동과 무정부주의운동'이라는 메시지를 보내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김진익과의 관계 

이회영은 자신의 동지이기도 한 김진익을 한때 상하이의 자신의 거처 근처에 숨겨주었다가 당시 홀로 분가해 살던 넷째 아들 이규창에게 보냈다.

이규창의 증언에 의하면 하루는 이규창의 집에 그가 이자경(이신애) 이라는 여자를 데리고 왔다. 김진익은 그 여자와 동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분가한지 얼마 안됐던 이규창은 아무 꺼리낌 없이 김진익과 동거녀 이자경을 받아주었다. 김진익은 여자 문제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물의를 빚기도 했지만 그는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그를 동지로써 도와주었다. 그런데 베이징 일대에서 큰 파문을 일으킨 강탈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사칭한 강도의 출현으로 베이징은 뒤집혔고 범인을 색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의심이 계속됐다.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장소에는 중국 경찰들의 감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주위 사람들이 이규창 일가를 중국 사람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이회영은 김진익과 그보다 그의 내연녀인 이자경의 존재가 안심이 되지 않아, 그보다 더 안전한 조카 이규봉의 은신처로 보낸다. 이회영은 아들 이규창에게 "네가 이자경 부인과 인력거를 타고 이규봉 사촌 형네로 가서 이자경 부인을 소개한 다음 당분간 거기서 지내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그러나 이자경은 조실하지 못한 행동으로 독립운동가는 물론 한국인 교포들, 중국인들에게도 눈쌀찌푸리게 했고 그는 이를 통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내연녀 이자경은 우물가에서 대낮인데도 벌거벗고 목욕을 하는데,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 동네 부인들이 목격을 했다는 것이다. 또 이규봉의 증언으로는 '동네 부인들의 남편들이 가끔 와서 우물가의 물을 떠가는데 이런 꼴을 중국 사람들에게 보이니 얼마나 창피하느냐는 것이다.' 이 소문은 동네에 쫙 퍼졌다. 중국 부인들은 떼거지로 몰려와 '당신네들 같은 고귀하고 점잖은 분들에게 어찌 그런 여자가 들어와 동네의 풍기를 문란케 하느냐?.'며 삿대질하기에 이르렀고 수시로 항의하였다. 참을수 없었던 이규봉이 삼촌 이회영을 찾아가 받아줄 수 없다고 하소연하기에 이르렀다. 여름철이라 모두 더위에 지쳐 있었고, 며칠 있다가 이규봉이 이회영을 찾아가 받아줄 수 없음을 하소연하였다. 왜 그런가 하고 이회영이 질문하니 이규봉이 아주 난처한 얼굴이 되어 천천히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저희가 사는 동네는 풍속이 구식이라 남녀 간의 차별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젊은 여자가 대낮에 벌거벗고 우물가에서 목욕을 하고 난잡한 짓을 하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회영이 '그래도 김진익 선생과 동거하는 여자인데'하니 이규봉은 '풍기가 문란하다고 동네 사람들이 야단입니다. 이러다가는 조선 사람들 모두 욕을 먹겠습니다.'라며 거절하였다. 이회영도 더 이상 어쩔수 없었고, 김진익은 다른 은신처를 알아봐야 했다. 나중에 이자경은 김진익과 함께 텐진으로 건너갔다. 김진익은 계속 추문을 일으켰고 물의를 빚었음에도 이회영은 끝까지 김진익을 감싸주었고 그의 은신처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가 죽고난 뒤에도 김진익은 중국 동료 독립운동가의 아내를 유혹하는 등 독립운동가 사이에 계속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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