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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한국민족운동의 내적 추진력이 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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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한국민족운동의 내적 추진력이 되다.(2)

 

독립협회 평가

독립협회는 청나라 등 중국의 예속하에 있던 것과 열강의 영향력을 비판하여 자주 독립을 주장한 것과, 백성들의 권리를 확립하며, 백성들의 인권을 최초로 주장한 점과 정치 참여를 최초로 주장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개혁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독립 협회는 외세의 조선 정치 개입을 비판하고 상징적인 존재인 독립문의 건립을 추진했으며 1898년에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혁신적인 개혁 정치를 요구하였다. 조선이 멸망한 뒤에도 독립협회는 역적집단으로 취급되다가 대한민국 수립 후인 1960년대부터 민중의 참정권과 민권 사상을 고취한 점에 대한 점이 주목되면서 긍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세기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던 시기에,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의 사상을 가지고 독립협회가 추진한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운동은, 그 뒤 일제의 주권침탈과 식민통치과정에서 항일독립운동과 국민국가수립운동 등 한국민족운동의 내적 추진력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독립협회 비판

일각에서는 앞서 말한 자주 국권, 자유 민권, 자강 개혁 각각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각이 있다. 독립협회의 주요 구성원은 지식인층과 지주와 상인이었으며, 거기에 정부 고위 관료와 이름 없는 민중들이 참여하였다. 이 시기에 황제는 황실의 권력을 강화하고, 황실 재정을 확충하고, 특권 상인을 옹호하며, 황실 소유의 토지를 확대함으로써 위에서 아래로의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립협회에서는 그들이 내세운 헌의 6조와는 달리 황제권을 유명무실하게 하고, 독립협회가 주도하여 위에서 아래로의 근대화를 추구하였고, 이에 따라 그들은 반정부운동을 전개한다. 다시 말해 황제와 독립협회는 위에서 아래로의 근대화를 추구했다는 점은 같았지만, 그 주체가 달랐다. 위에서 아래로의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민중의 몰락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고, 현실적으로 민중을 수탈하는 주체는 황실이었으므로 독립협회의 반정부운동에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근대화 방안은 민중의 몰락을 촉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극심한 사회진화론과 우민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민중의 지지를 얻는 데에도 소홀했으며, 심지어 자신들과 같은 계층인 서민 지주, 요호와 부농 및 사상인(私商人, 자유 상인)이 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려고 요청한 지회 설립조차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해산되기 얼마 전에야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독립협회가 개최하였던 만민공동회가 민중의 지지에 바탕을 둔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를 개최할 때 독립협회의 이름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은 일이나, 외국계 학교의 학생을 동원하여 독립협회가 그 배후임을 은폐하려 한 일이 있었다. 또한 박영효 세력이 만민공동회의 폭력화를 부추겼으며, 폭력 시위로 말미암은 무정부 상태에 편승하여 귀국, 정권을 장악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만민공동회 활동과 관련하여,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에 사주하여 결의한 헌의 6조에 배치되는 활동이 자주 나타났고, 그에 따라 황실에서는 독립협회를 탄압하려고 했다.

이러한 독립협회의 활동이 일본이나 미국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해 주었고, 오히려 황실에서 추진하는 광무개혁이 일본이나 미국이 추진하는 경제적 침탈에 불리하게 작용하자, 그들은 황실의 만민공동회 탄압 계획을 번번이 저지하였다. 그들은 또한 독립협회 활동의 폭력화로 말미암아 무정부상태가 되는 일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악의 사태는 무정부상태로 말미암아 고종이 제2의 아관파천을 하는 일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그것을 막기 위해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은 억제하면서, 박영효 세력을 저지하는 한편 무력 진압을 양해하였다. 그 결과 독립협회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외세 의존성을 심화하게 된다.

 

독립협회에 대한 오해

교과서에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게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고 씌어 있다. 그러나 발기인이었던 서재필이 남긴 기록에서는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한 단체로 나와 있으며, 순수 민간 단체이지도 않았다. 일각에서는 독립협회 역시 '황국협회와 마찬가지로 황실 및 고위관료가 다수 참여하였고, 황국협회와 대립하지도 않았다. 엄밀히 말해 독립협회 내부의 일부 친일파가 민간 주도의 상업활동을 권장하던 황국협회의 활동을 심각하게 방해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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