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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이순신의 죽음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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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선조 30년)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회담이 파행으로 결렬되고 일본과의 전쟁이 재발할 위험성이 커지자 곽재우는 조선 정부의 부름으로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에 임명되었다. 경상좌도방어사로 그는 현풍의 석문산성을 신축하였으나, 산성이 완공되기도 전에 왜군이 근처까지 침입하여 8월에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옮겨 성을 수비하였다. 해 음력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마을에서 일본군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사촌형 곽재겸 등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쌓고 성곽을 수비하였고, 창녕에서부터 현풍, 달성 일대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597년 전쟁 중 계모 김해허씨가 사망하였으므로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3년상을 입었다. 상중에 전란은 종결되었고, 전란이 끝난 뒤에는 그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특별 승진하였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경상좌병사로 부임 직후 왜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그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군사들을 고향에 되돌려 보내고 생업과 농사일에 종사하게 해줄 것을 왕에게 제안하였다. 그러나, 왕이 거절하자 그는 벼슬을 내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어부 생활을 하였다. 한편 그는 전쟁을 하며 기묘한 전술로 승리했는데, 적군 군선의 예상 경로를 예측해 해로에 통나무를 띄워 적의 물자 보급을 막았다. 또한, 왜군이 늪지대를 건너기 위해 안전한 곳마다 깃발을 꽂아 군사들이 그 곳으로 지나게 하려는 계획을 알아채고 깃발을 늪지대에 꽂아 늪에 빠지게 한 뒤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또 다른 병사들에게도 붉은 옷을 입혀 교란 전술을 썼다. 또 보물이 들어있을 것 같은 황금 상자에 벌을 담은 후 길가에다 버려 놓았는데, 이를 보물 상자로 착각한 왜군이 열었다가 벌에 쏘여 죽기도 했다. 이 외에도 이정표를 바꿔 적을 혼란에 빠트리는 등의 기묘한 전술로 나라를 지켜냈다.

 

종전 직후와 은거

1599년(선조 30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계모의 상중이었으므로 사퇴하였다. 동년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계모의 상중이었으므로 1개월간 지체하여 10월에 부임하였다. 1600년(선조 33년) 2월 일본과 화친을 할 것을 건의했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추국당하였다.

 

"곤수는 이미 중임을 받아 병권을 전제(專制)하고 있으니 임의로 버리고 가서는 안 됩니다. 국법이 매우 엄할 뿐더러 신하의 의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결단코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경상 좌수사 곽재우는 적을 토벌해야 하는 의리는 생각하지도 않고 화친을 통하기를 주장하면서 심지어 정백(鄭伯)이 어깨를 드러내고 양을 몰았다는 일까지 인용, 이를 문서에 드러내어 천청(天聽)을 번거롭혔습니다.

그리고는 소장을 올리자마자 진(鎭)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으니 그의 교만하고 패려한 죄를 징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다가 추국하여 율(律)에 의거 죄를 정하소서."

 

동년 봄, 그는 병을 이유로 사직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그러나 사헌부등으로부터 함부로 사퇴하였다는 이유와 전해 부임을 지체한 점 등을 구실로 탄핵을 받아 전라남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 1602년 유배된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해 고향이 돌아와 현풍 비슬산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 남쪽 창녕 창암진 솥바위나루 낙동강변에 정자를 짓고 망우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시문 등으로 소일하였다.

그러나 선조로부터 다시 거듭 출사 요청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년) 초 찰리사가 되었다.

 

관료생활 

찰리사로 재직 중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 수축과 개보수를 건의하였다. 이어 그해 5월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찰리사직에서 사직하였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04년 8월 행(行)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가 10월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고, 11월 승자(陞者)하여 가선대부 용양위상호군에 제수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한성부우윤을 지냈다. 1605년 2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된 뒤 동년 3월 한성부우윤이 되고, 5월 전라도병마절도사로 나갔다.

1607년(선조 40년) 3월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말 사헌부로부터 음식을 끊고 도술과 수련에 전념한다는 점을 이유로 여러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다시 행용양위부호군으로 돌아왔으며, 1609년(광해군 1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해 광해군은 그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선조와 광해군, 북인 정권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던 그는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생애 후반

그 뒤에도 왕이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패랭이 장사를 하거나 솔잎을 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또한 동문수학하였던 정인홍 등과도 생각이 달랐으므로 그들은 이를 꺼렸다. 광해군 즉위 초 경상우도조방장(慶尙右道助防將)이 되었으나 사퇴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은 여러번 망우정으로 사람을 보내 관직에 출사할 것을 간청하여 결국 그해 한성으로 상경, 오위도총부의 부총관, 행호분위부호군, 호분위대호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지냈다.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바로 함경도관찰사에 임명하여 부임하였다. 함경도관찰사 임기가 만료된 1612년(광해군 4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자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조정에서 인목대비 폐모론과 영창대군(永昌大君)에 대한 사형 건의가 나타나자 그는 인륜이 무너졌다고 분개하였다. 1613년(광해군 5년) 4월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대북 계열에 의해 영창대군에 대한 탄핵이 있자, 1613년 6월 사직 상소와 함께 영창대군에게 죄가 없다는 상소문을 올리고 낙향했다. 이후,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거나 사퇴하였다.

1616년(광해군 8년) 창암강사에서 은거 중 장례원판결사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곽재우의 최후 

그 후로도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한성부좌윤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나라의 형편이 어지러워지고,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죄없는 김덕령이 죽은 일 등을 통탄하여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당시, 여러 차례 경상도 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의 고위 무관직을 제의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다 1617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갑자기 회오리가 그의 집을 덮쳤다는 설, 신선이 되었다는 설 등이 나돌았다. 글씨도 잘 썼는데 필체가 웅건하고 굵었으며, 시문에도 능했다. 4월 28일 광해군의 명으로 장례비와 장례물품이 조정에서 지급되었고 바로 예관을 파견하여 장사를 지냈으며, 예조좌랑 유약(柳瀹)을 파견하여 장례식을 주관하게 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66세였다.

 

사후 

1617년(광해군 9년) 사람들은 지역 유림들의 공의로 그를 추마히기 위하여 의령 가태동에 충현사라는 사당을 세웠으며, 광해군 때 그의 사당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숙종은 그의 공적을 높이 사, 1709년(숙종 35년) 증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하고, 다시 충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으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곽재우전이라는 군담 소설이 있으나 작자나 연대는 알 수가 없다. 그의 유품들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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