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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박성춘, 시민들의 주장과 힘을 보여준 대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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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공동회, 박성춘, 시민들의 주장과 힘을 보여준 대중운동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또는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는 조선말, 대한제국의 대토론회, 시민운동이자 시민사회단체로 독립협회에서 처음 주관하였다가 1898년 4월을 기점으로 독립협회의 영향력에서 독자적인 민중대회, 단체로 성장했다. 1897년(광무 1년) 초 독립협회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 주최하에 민중대회로 처음 개최되었으며, 한성부의 시민, 소상인, 일부 지식인층이 참여했다. 이후 1897년 10월 박정양을 비롯한 정부의 개혁적 관료들과 독립협회가 함께 주관하면서 범국민적인 대회, 단체로 성장했다. 정부 측의 박정양, 이상재, 독립협회 측의 서재필, 윤치호 등이 이를 지도하였다. 만민공동회는 처음에는 사교 모임 형태였으나 연설과 강연, 웅변, 조정에 대한 민중의 건의사항 등을 채택하고 공개적으로 결정하는 모임으로 확대되고, 전국 각지에 지부를 두었다.

1898년(광무 2) 3월부터는 러시아, 프랑스 등 열강의 이권 개입을 반대하는 등 제국주의 침략 반대 운동을 펼쳤으며, 점차 독립협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1898년 10월부터는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익명서 사건 이후 1898년 12월 정부의 탄압으로 무산되고 만다. 1899년까지 존속하다가 폐지되었다.

 

배경

1895년(고종 33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청나라의 명목상 예속국이던 조선의 자주독립과 부패정치 척결, 내정개혁, 민중의 참정권과 민권 운동을 위해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민중계몽과 참정권, 천부인권을 소개하고, 백성의 정치참여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독립협회는 회원 가입에 자격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보다 많은 백성들과 다양한 계층의 참여를 위해 1897년 독립협회서재필, 윤치, 이상재 등의 주최 하에 한성부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다. 독립협회와 그 밖의 단체 회원, 양반관료, 중인, 지식인과 평민,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참여한 대중집회였으며 처음에는 독립협회와 관료들이 주도하였다. 관료의 참여에 의를 두어 출범 초기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라 부르기도 했다. 만민공동회는 국정을 개혁하기 위한 많은 연설과 토론, 발표, 웅변 등이 있었으며 발언권에는 제한이 없었다. 그뒤 1898년 3월 이후 독립협회의 영향력을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과 독자적인 집회를 진행하였다.

 

헌의 6조 채택

만민공동회 중에서 최대 규모로 열린 것은 1898년 10월 29일에 10여개의 각종 정치단체가 주최하고 군중의 요구에 의해 10여명의 정부 대신들까지 참여하여 종로에서 열린 관민공동회였다. 한성부 주민은 물론 독립협회, 국민협회, 협성회, 일진회 그리고 정부대표로 의정부 참정대신 박정양, 중추원 의장 한규설, 법부대신 서정순, 농상공부대신 김명규, 탁지부대신서리 고영희 등이 참석하였다. 지식인, 중인, 향리, 성균관사부학당의 학생, 신식학교 학생, 부인, 상인, 승려, 천주교도, 기생, 광대, 백정 등 신분과 관계 없이 1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이 회의에서 개막 연설을 한 사람은 당시 가장 천대받던 계층인 백정출신 박성춘(朴成春)이었다. 박성춘은 백정 출신이었으나 속량하고 양민이 된 해방된 천민이었다.

 

이 사람은 대한에서 가장 천하고 무지몰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 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국편민하는 길은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지만 많은 장대를 합해 받치면 그 힘이 매우 공고해집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년 이어지도록 하게 합시다.

 

백정 출신 박성춘연설에 군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어 누구든지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소견을 발표했다. 이들의 활동은 이날 회장으로 선출된 박성춘의 연설문의 내용 중 '우리 모두 힘을 모아 황제의 성은에 보답하자'라는 글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황제권을 부정하지는 않고, 입헌군주제를 추구하였다. 이 날 회의에서 정부의 외세의존적인 경향을 공격하고 시국에 대한 6개조의 개혁안을 결의하여 고종에게 주청하였다.

1898년 10월 29일의 만민공동회 회의에서는 헌의 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여 정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이날 공동회에서 결의된 헌의 6조는 외국에 의존하지 말고 전제왕권을 공고히 할 것, 이권 양여와 외국 차관도입, 외국군대의 지원, 외국과의 조약을 각부 대신과 민중대표인 중추원 의장이 합동으로 서명하여 시행하게 할 것, 전국 관청의 재정은 모두 탁지부에서 일괄 관할하고 예산과 결산과 용도는 인민에게 공포할 것, 중죄인은 공판(공개재판)에 회부하되 자복한 후에 재판할 것, 칙임관황제가 일방적으로 임명하지 말고 정부의 과반수 동의를 받아 임명토록 할 것, 성문화된 장정(법률)을 시행할 것 등이었다. 이는 독립협회에서도 같은 무렵 정부에 제출한 헌의 6조와 유사하였다. 만민공동회의 헌의 6조는 독립협회의 헌의 6조 주장과 유사하나, 만민공동회는 민권 신장의 방법으로서 중추원에 대해 하원 설치를 요구하고, 하원 의원들 직접적으로 선출하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독립협회의 헌의 6조와 다소 차이를 보이고있다.

 

의회 설립 운동과 중추원 설립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 함께 고종에게 의회 설립을 주장했고, 거듭된 상주 끝에 고종에게 10월의회 설립을 허락받았다. 1898년(광무 1년) 11월 1일 종로에는 다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고종 황제에게 재가를 기다렸다. 이에 고종은 "헌의 6조는 마땅히 실시할 것이며 그 밖에도 몇 조항을 첨가해 조칙으로 반포할 것이니 해산하여 기다려라." 고종은 이렇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탄압이 가해졌다.

11월 2일 새로운 중추원 관제가 발표되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의회 설립안이었다. 중추원 의관 50명 중 절반은 정부가 국가에 공로 있는 자를 천거하고, 절반은 독립협회에서 27세 이상의 정치, 법률, 학식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 하게 되었다. 독립협회와 서울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독립협회는 11월 5일 독립관에서 선거하기로 했다. 그런데 11월 5일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순검들에 의해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하여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되었다. 회장 윤치호는 체포 직전 몸을 피했다.

관민공동회에 참석했던 박정양 이하 정부 관료들도 해임되고 대신 조병세, 조병식, 박제순, 민영기 등이 그 자리에 앉았다. 수구파가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이다. 중추원 의원 선거 전날, 수구파는 독립협회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하려 한다며 황제를 몰아내고 대통령박정양, 부통령윤치호, 내부대신 이상재, 외무대신 정교(鄭喬) 등으로 정권을 쥐려 한다는 익명서를 거리에 내다붙였고, 익명서에 놀란 황제가 독립협회 간부 체포령과 협회 해산령을 내렸던 것이다. 최초의 의회 설립 운동은 이렇게 무산되었다.

날이 밝자 민중은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열고 사건 경위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상인들도 이에 호응, 철시했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11월 10일 체포된 11명 전원을 석방했다. 하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시위대는 '헌의 6조 실시'를 요구했고, 익명서를 조작한 조병식, 이기동 등의 처벌, 독립협회 부활 등을 요구했다.

 

정부의 탄압과 해체

만민공동회 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자, 대한제국 정부는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한편으로는 탄압을 했다. 공동회가 1898년 11월에 올린 헌의 6조 개혁안에 대해 국왕 고종도 처음에는 정당성을 인정하고 실시를 약속했으나, 수구파 관료들의 반대와 모함으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정부관료 보수파 세력은 고종에게 서재필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의회개설 운동을 통해 공화정을 수립하려 한다고 모함하였다. 그리고 시중에 이 소문을 유포시키고 박정양대통령-윤치호부통령설, 윤치호대통령설을 유포하였다. 이를 계기로 독립협회의 영향력에 머물러있던 만민공동회에 대해서도 탄압에 들어갔다.

독립협회의 정권장악 소문이 수구파와 근왕파 대신들에 의해 유포되면서 이를 빌미로 삼아 독립협회 간부 17명과 함께 만민공동회의 주요인사를 체포했다. 이에 반발한 만민공동회가 민중 대표자를 석방할 것을 주장하며 한성부 종로와 남대문 등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자 근왕파 대신들은 황국협회 소속 보부상을 시켜, 전국의 보부상들을 한성으로 결집시켜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이후 황제는 양회의 해산을 명령하고 헌의 6조는 폐지시켰다. 그뒤 1899년 독립협회의 해산 후에도 만민공동회는 얼마 동안 활약했으나, 정부의 탄압을 받은 후에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였다.

 

의의와 한계

만민공동회의 운동은 비록 정부의 탄압을 받아 실패하고 말았다. 소시민의 정치적 역량의 미숙으로 인하여 대중적 지지 기반을 갖추지 못했고, 소수 지식인이 주도하던 독립협회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공동회는 독립협회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고, 그결과 당시 농민운동과도 결합하지 못했다.

만민공동회 운동은 시민들의 주장과 힘을 보여준 대중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를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려 한 외세 의존적인 독립 협회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평민과 백정, 기생, 광대도 참여하고 백정 출신이 한때 회장으로 선출될 만큼 열린 대중집회였지만 당시 민중 운동의 주류였던 농민 운동과 결합하지 못한 것과 여성의 차별대우를 인식하지 못한 점 등이 시대적인 한계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평가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던 지식인들 일부를 근대적 자주 민권 사상과 자강 사상을 가진 인물로 전환시킨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참여하고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자유로운 연설, 안건 발의가 이루어져 사실상의 신분 해방의 현장으로서 대중성을 고양시킬 수 있었고, 신분과 재산, 계층을 가리지 않은 범국민적 정치운동이었다는 점,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경제침탈로 인해 직접 피해를 입고 있었던 도시소상인, 소수공업자, 빈민과 일부 지식인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반제국주의와 정부의 부패행위 감시 등을 시도한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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