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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 두 차례에 걸친 연행을 통하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개항을 역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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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 두 차례에 걸친 연행을 통하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개항을 역설하다.

 

박규수(朴珪壽, 1807년 10월 27일 ~ 1877년 2월 9일)는 조선 시대 말기의 문신으로 군인, 외교관, 개화사상가, 철학자이며 화가, 지도 제작자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제네럴 셔먼 호를 격퇴하고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연암 박지원의 학문 및 사상의 계승자로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후 양무 운동처럼 서양 기술의 선택적 도입과 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으며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848년(헌종 14년) 42세 때 증광시에 합격해 출사했다. 당시 세도 정치 하에서 비주류였던 북학파 출신으로 요직과 거리가 멀었지만 1862년(철종 13년) 진주민란을 수습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에서 승리하는 등 잇따른 난을 평정한 공으로 크게 승진했다. 사헌부 대사헌홍문관 제학을 거쳐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의 하나인 대제학에 올랐고, 이후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지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때까지 줄기차게 개화를 주장하면서 대원군 및 척사파들과 계속 갈등을 빚고 실각했다. 1877년 수원부 유수로 재직 중 죽었다.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초명은 규학(珪鶴), 자는 환경(桓卿→瓛卿) 또는 정경(鼎卿), 호는 환재(桓齋→瓛齋), 헌재(獻齋), 환재거사(瓛齋居士) 등이다. 이정리, 이정관, 류화, 김정희의 문인이며 시호는 문익공(文翼公)이다.

사상과 신념

그의 개화 사상은 실학 사상의 근대지향적 측면을 내재적으로 계승한 위에 외발적 요인이 작용해 촉발된 것으로, 선대의 북학파 학자들이 주장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다. 두 차례에 걸친 연행을 통하여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서구에 보다 우수한 문명이 있음을 인정, 좋은 것은 과감하게 수용하자는 의견을 개진하게 됐다. 중국의 개화파 관리들과 접촉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개항을 역설했다.

 

개항, 개국론

그는 서양사정에 밝아 신문물의 수입과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그는 개항을 통해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후대의 개화파에게 전달하여 북학파의 개혁, 실용주의 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현실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하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했다.

그의 개국론은 그가 운양호 사건 직전 '일본이 수호를 운운하면서 병선을 이끌고 온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수호의 사신이라 하니 우리가 먼저 선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의외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유사시 무력 충돌도 불사한다는 자주적 개국으로, 무력적 굴복에 따른 타율적 개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국론은 일본에 굴복하는 것처럼 곡해됐다.

그는 척화론을 공리공담과 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했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비판했다. 그는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했고,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이상재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쇄국 정책에 대해

개항파로 알려진 박규수의 행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성균관 대학교 한국한문학과 김명호 교수에 따르면, 그가 척사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대원군의 양이 정책에 동조했으며 다만 교섭 여지를 주어 서양을 중화문명에 귀의시키려 했을 뿐이란 것이다.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던 1866년 박규수는 강경한 척화파처럼 보인다. 이어 셰난도어호 내항 때에도 그가 미국·중국 등에 직접 지어 보낸 각종 문서는 어디까지나 정부 측의 강경한 입장 내지 힐문장들이었다. 1871년 신미양요 때에도 미국과의 교전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했다.

김명호 교수에 의하면 “박규수가 양이를 주장하는 이항로의 상소를 칭찬했으며 서양 오랑캐와 화친 불허 등을 담은 대원군의 양이책을 전폭 지지했다”며 박규수를 대표적인 주화론자나 개국을 구상한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신미양요 시기에 박규수가 대미수교를 원했다는 종래의 논의는 단편적인 자료를 통해 확대해석한 결과”라고 주장했다.

한편 제너럴 셔먼 호에 승선했다가 살해된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을 거슬러온 것이 박규수의 초청 때문이었다는 설에 대해서도 김명호 교수는 이를 부정했다. 토마스 목사가 베이징에서 박규수를 만나 선교활동의 지지와 후원 약속을 받았다는 설은 전혀 사실 무근으로, 셔먼호 사건을 전후해 박규수는 베이징에 간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위선적인 도덕관에 대한 비판

북학파들의 문제 인식 속에는 양반 사회의 모순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박규수 역시 사대부들의 도덕과 명분론이 허울이며 위선임을 지적했다. 선대의 선비들이 현실 정치나 벼슬길을 멀리했던 것은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다음은 벼슬길에 출사한 후 친지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대저 선배들이 벼슬길을 멀리한 것은 그들이 청렴결백한 때문은 아니라 봅니다...(인용문)...중고 시대의 사대부들은 실은 꿋꿋한 절개를 숭상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이해득실에 밝았던 분들일 것이외다. 자기 총명과 기력을 낭비할까봐, 아니면 어차피 견제 때문에 배운 바를 발휘하기 어려우니까, 혹은 염치불구하고 봐도 뜯어먹을만한 것이 없었던지요. 선대의 옛사람들도 우리같은 인간일 뿐, 행장이나 전기문에서 지나치게 그들을 정의롭고 도덕적 존재인 것처럼 미화했을 따름입니다."

 

공부가 완숙해질대로 완숙해진 42세 이후의 출사길이니까 젊은 혈기로 한 말은 아니다. 그를 비롯한 북학파들의 작품이나 언급에서 나타나는 조선 사회 모순의 핵심은 양반들이었고 그들의 위선과 아집이 역사적 발전을 막았기 때문에 오늘의 문제가 계속된다는 공통적인 문제의식이 있었다.

 

합리적인 외교론

외교관계에 있어서 도의적인 것과 감정 보다는 실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외교의 기본이라 주장했다. 이에 따라 위정척사파의 맹목적인 폐쇄론에 저항하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외국의 주장이 합당하다면 이를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어느정도 수용해야 됨을 역설했다. 외국의 주장을 수용하는 한편 타협을 통해서 절충안을 찾자고 주장했다.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될 때는 막후에서 반대파를 설득하여 조약 체결에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호칭 문제가 아니라며 실질적으로 조선이 획득할 수 있는 이익을 찾아야 함을 역설했다. 1875년(고종 13년)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최익현(崔益鉉) 등의 강력한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했다. 그 뒤 그는 척사파로부터 온갖 인신공격에 시달리게 된다.

 

동도서기론

그의 제자들이 메이지 유신식 개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도 같은 입장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상 그는 청나라의 동도서기론을 주장했다. 어디까지나 양무 운동 모델을 따른 것이다. 그는 서양법(西洋法)에 대한 동양 학문과 도덕성의 우월함을 확신했던 유학자로, 북학파 사상의 연장선상에서의 개국통상론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각자 스승인 박규수의 사상을 시대적 상황에 맞게 실천한 것 뿐이다. 서양의 물질 문명은 역시 우수하나 아편 전쟁이나 포함 외교 등을 미뤄봤을 때 분명 서양의 것을 답습해선 안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동양의 정신을 지키면 서양 역시 배울 점이 있고 개선될 점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였다.

 

사대부와 백성

박규수는 백성이 있은 뒤에야 사대부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사대부가 백성의 윗사람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그 직분이라 가르쳤다.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다음은 그 일화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대에까지는 한성부의 벌열가문이었지만 조부 박지원의 대부터는 재산이 없었다. 그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문하생인 생원인 주씨(周氏)가 박규수 모르게 논 80석을 사뒀다. 그런데 신씨(申氏) 성을 가진 시골 노인이 찾아와 '연전에 사기를 당해 대감댁 땅을 모르고 샀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했다. 박규수는 주 생원을 불러 땅 문서를 신씨 노인에게 주라 했다. 주생원이 후생들을 위해 그러지 말라고 애걸하였으나 박규수는 '백성이 있고 사대부가 있는 법'이라며 끝내 노인에게 주게 했다.

 

유길준 가문과의 악연

연암 박지원과 유길준의 5대조 유한준은 당대 쌍벽을 이루던 문장가들로 본래 문우(文友)이자 친구였는데, 연암 박지원유한준의 글을 풍자한 데서 감정싸움이 오가다가 이런저런 일이 있어 둘은 끝내 원수가 됐다. 싸움은 대를 이어 후일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과정록에서 유한준을 깎아 내렸다.

 

"유한준은 아버지(박지원말함)가 자신의 글을 포폄한 편지로 인해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게 됐다. 아버지가 중년 이래 비방을 받은 것은 모두 이 사람이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한 것이었다. 당시 경주 김가가 권세를 잡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본디 이들과 사이가 안 좋았으므로 유한준은 이때를 틈타서 아버지를 해치려 했던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음험한 자인가! 이 자는 우리 집안 백세(百世)의 원수이다."                           과정록 중에서

 

저암 유한준과 연암 박지원은 집안끼리 친분이 있었고 연배도 비슷해 젊은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연암 박지원유한준에게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고 여러 차례 혹평했다. 그러자 저암은 연암에게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을 쓴다'라며 몰아붙였다. 결정적으로 선산 이장 문제가 불거지면서 원수가 되는데, 연암이 조부 박필균과 친부 박사유의 묘를 이장코자 한 곳이 마침 기계 유씨 선산 근처였었다. 유한준은 이를 반대하다가 막을 방법이 없자, 원래 집안의 정자가 있던 곳이라며 어린 나이(15세)에 죽은 자기 손자를 박필균 묘 위에 매장해 법률로 다투게 됐다. 이에 박종채는 유한준의 집안을 일컬어 '백세의 원수'로 규정한 것이었고, 이에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도 연암을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었다라고 받아치는 등 감정의 골은 돌이킬 수 없게 됐었다.

1871년 홍문관 제학 박규수는 향시에서 장원으로 뽑힌 시 한 수를 읽고는 장원급제자를 호출했다. 그가 당시 16세의 유길준으로 바로 유한준의 5대손이었다. 그러자 유길준의 아버지 유진수가 '어떻게 원수같은 자를 찾아간다는 말이냐'며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홍문관 제학으로 유길준을 만난 박규수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를 거듭 칭찬하고는, '너희 집과 우리 집이 지난날 사소한 문제로 불화했으나 이제부터 옛날처럼 다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어른들이 풀지 못하셨던 감정을 우리가 풀어드리는 셈이 되는게 아니겠냐'며 감개무량해했다. 또한 힘써 공부할 것을 당부하고 구원(舊怨)을 잊고 자주 찾아오라며 은근하게 대했다. 그의 인품에 감복한 유길준은 그 때부터 박규수를 스승으로 예우하고 배웠으며 개화파로서 평탄하지만은 않은 삶을 관철했다.

 

학문 연구와 교유

할아버지 박지원, 유형원, 박제가, 이익, 정약용, 서유구, 김매순(金邁淳), 조종영, 홍석주(洪奭周), 윤정현(尹定鉉) 등을 선배로서 사숙했고, 문우로서 남병철, 김영작, 김상현(金尙鉉), 신응조(申應朝), 윤종의, 신석우(申錫愚) 등과 주로 교유했다.

그의 학풍은 제자의 한 사람인 김윤식(金允植)의 지적에 의 하면 "크게는 체국경야(體國經野)의 제(制)로부터 작게는 금석(金石)·고고(考古)·의기(儀器)·잡복(雜服) 등의 일까지 연구하여 정확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하지 않는 바가 없고, 규모가 굉대하고 종리(綜理)가 미세 정밀"했다 한다.

박지원의 손자로서 인맥으로도 북학파에 직결되는 그가 사숙한 선배 중에는 박지원, 박제가노론북학파 외에도 남인정약용(丁若鏞), 서유구(徐有榘), 북인유형원, 윤휴 등의 학문도 폭넓게 사숙했다. 다양한 선배 학자들의 학문을 사숙하였던 탓에 어떤 특정한 사상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한 소론유수원의 학문에도 관심을 갖기도 했다.

백의정승 유대치, 중인 출신 외교관 오경석 등과는 신분을 초월하여 친구로 사귀었고, 승려 이동인은 사상을 떠나 친구로 지냈다. 박규수는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평가해야 된다고 했다. 박규수는 자신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박정양, 서재필,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어윤중, 윤웅렬 등의 제자, 문인들을 길러냈다.

 

작품 활동과 지도 제작

그림도 좋아해 수백 여 편의 그림과 글씨를 남겼다고 하나 6.25 전쟁 때 작품들이 대부분 소실됐다. 앞에서 기술했듯 그의 글씨는 청나라 고관대작들의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고전 읽기와 공부 방법을 흥미롭게 엮은 '상고도회문의례' 16권을 지었고, 그가 직접 제작한 지구본 설계도 평혼의(平渾儀)와 천문지도 간평의(簡平儀)의 종이 제작본 등이 현재 전한다.

문인화와 수묵화 외에도 또한 경기도 지도인 동진방략(東津方略)을 그렸고, 평안도 전도를 그리기도 했다. 청나라의 세계지도와 천문도 등 여러 문헌을 참고해 세계 지도혼평의(渾平義)와 천문도, 간평의(簡平義) 등 천문지도를 제작했다.

박규수의 해시계이자 천문도인 '간평의(簡平儀)의 종이 제작본은 2006년 5월 실학박물관 기공식 때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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