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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 안전가옥에서 열린 연회중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와 함께 사살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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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 안전가옥에서 열린 연회중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와 함께 사살되다.

 

차지철(車智澈, 1934년 11월 16일 ~ 1979년 10월 26일)은 대한민국군인이자 정치가이며 정무직공무원이다.

차지철은 1934년 11월 16일경기도 이천에서 아버지 차수찬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서울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성장하였고 용산고를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12기에 지원하였으나 낙방하고, 1954년 7월대한민국 육군 갑종장교 포병간부후보생을 통해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미국에서 육군포병학교를 수료하였다. 1959년에 육군 공수특전단에 배속되었다. 1960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조지아 주 포트베닝의 레인저스쿨을 수료하였다. 이듬해인 1961년 제1공수특전단 중대장의 신분으로 박정희가 주축이 된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다.

쿠데타의 성공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62년 육군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전역한 뒤 1964년국민대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고 1966년한양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1970년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어서 계속 공화당 국회의원직을 유지했다. 그 후에는 국회 외무국방위원장까지 지내며 국회에서 나름대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66년 33세에 송희성과 결혼하였으나 10.26 사태 후 언론보도를 보면 어머니 김대안과 아내 윤보영 등이 기절했다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송희성과 이혼하고 윤보영과 재혼한 것을 알 수 있다. 1991년 7월 11일 보도를 보면 송희성이 중앙일보를 상대로 2억원의 위자료 청구소송을 했다는 기사도 있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차지철은 유신정우회 의원이 되었으며, 2년 뒤인 1974년에는 영부인 육영수 저격사건으로 자진사퇴한 박종규의 후임으로 제3대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총애를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부산 마산에 대한 학살을 주장했다.

 

사망

차지철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열린 연회중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와 함께 사살되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심복이었던 김재규가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과 그 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살해한 경위는 아직까지도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어린 두딸이 있었는데, 장례식 당시 검은 상복을 입고 울고있는 어린 두 딸(10세 전후)의 모습이 권력무상을 알게하고, 어쨌든 차지철은 이후 유신정권의 2인자로 제1공화국 당시 특무대장 김창룡 못지 않게 인간적으로 나쁘게 평가되어 있다. 차지철의 무덤의 위치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인물평

학창시절에는 그리 튀지 않고 말도 별로 없으며 친구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차지철과 당시 유일한 친구였다던 용산고등학교 동창 허봉은 친구지간에 말다툼도 없고 싸우는 일도 없었다고 하며 내성적이고 온순하고 선량하고 누구하고 싸우는 걸 보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박정희에 대해서는 자기가 청렴결백하니 존경하고 숭배의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태권도 5단, 검도 4단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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