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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2004년 10·26사태에 대한 재평가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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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2004년 10·26사태에 대한 재평가 시도

 

김재규(金載圭, 1926년 3월 6일 ~ 1980년 5월 24일)는 대한민국군인이자 정무직공무원이었다. 대한민국 건설부 장관과 중앙 정보부장을 지냈다. 1980년 5월 24일,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죄로 서울구치소(지금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사형되었다.
김재규는 1926년 3월 6일경상북도 구미에서 아버지 김형철과 어머니 권이금 사이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정희의 고향 후배이자 육사 2기 동기이기도 하다.

 

1954년 5사단 36연대장, 제101연대장, 1956년 준장 진급, 1957년에는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석방된 이후에 그의 수하가 되어 적극 협조하게 되었다.

5.16 이후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1961년 호남비료 사장, 1963년 6사단장이 되었다. 6사단장 시절이던 6.3사태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게 된다. 1968년 육군 방첩부대장에 임명되었다. 1969년 4월에 육군 방첩부대가 보안 사령부로 개편되었다. 1971년 9월까지 임무수행 후 3군 단장에 임명되었고 이를 끝으로 1973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73년 유신 정우회 소속의 제9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하고 동년 중앙정보부 차장, 1974년 건설부 장관을 역임하다가 1976년 12월 4일부로 중앙 정보부장에 임명되며 국회의원 직을 사퇴하였다.

유신정권 말기

김재규는 중앙 정보부장에 임명된 이후 대통령 경호실장인 차지철과 꾸준히 권력 암투를 벌이며 대립해왔다.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 1979년 8월11일에 발생한 YH 무역 여공 농성 사건10월 4일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10월 16일부마사태 등 계속되는 불안한 정국 사태를 지켜보면서, 유신 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에 서울 궁정동에 위치한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박정희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식사 도중 박정희차지철발터 PPK 권총으로 사살하며 10.26 사태일으켰다.

사건 후

미리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불러두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중앙정보부 2차장보 김정섭과 함께 차를 타고 육군본부로 향했다. 이는 훗날에 10.26 사태가 김재규의 우발적 범행이라는 주장에 강하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김재규의 말대로 그가 박정희를 암살하는 것이 오랫동안 계획해온 것이든, 우발적 살인이었든 그 상황에서는 자신의 본거지인 중앙정보부로 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육군본부 도착 후, 청와대에 있는 김계원에게 전화를 걸어 최규하 국무총리를 모시고 육군본부로 오라고 다그쳤다. 최규하가 도착 후 진행된 국무회의에서 김재규의 계엄을 선포하고 보안을 유지하자는 주장은 각 부장관들과 국무 위원들에게 동의를 얻지 못했다.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최규하 총리는 국무회의 장소를 국방부로 옮기겠다고 하였다.

 

체포

최규하가 국방부에서 주관한 국무회의에 참여하였다가 10월 27일 새벽 보안 사령관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보안사 보안청 2과장 오이랑 중령이 이끄는 병력에 체포되어 보안 사령부 정동 분실로 압송되었다. 보안 사령관 비서실장 허화평과 수사관 진동기의 심문을 받던 중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서빙고 분실로 이송되었다.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간질환 외에는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결과를 받고 이어서 보안부대 경남지구대장 백동림 대령과 보안사 수사과장 이학봉 중령의 심문을 받았다. 전두환은 체포된 김재규에게 그대는 역적이고 배신자이니 어쩔 수 없이 죽어야 된다고 말했다. 전두환은 김재규의 남동생 김항규에게도 사정을 양해했다고 한다.

 

김항규는 "전 장군은 '나는 군 선배로서의 김재규 장군은 존경하지만 국가원수에 대한 일이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이해해 달라.'라고 말하였다."라고 1993년에 밝혔다. 전두환은 김항규에게 "미국의 카터나 소련의 브레주네프가 찾아와도 형님은 살릴 수 없다."라고 말했다. 10월 27일 하루 3회의 신문조서를 작성했고 이는 수사관들의 손을 거쳐서 대검으로 넘겨졌다.

보안사 수사 결과는 대검 1과로 넘겨졌고 대검찰청은 이종남 대검 특수부 1과장, 이건개, 정경씩, 주광일 검사 등으로 대응 팀이 구성되었다. 수사 결과는 10월 28일 오후 4시 국방부 제1회의실 기자회견장에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에 의해 발표되었다.


전두환10.26 사태를 김재규가 정권을 잡아보겠다는 망상에 빠져 은연중에 계획하고 저지른 범행으로 규정하고 김재규는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라고 하였다. 10월 28일 최종진술과 함께 자필 항소이유 보충 시를 작성하여 육군교도소 교도관 변 후 연 상사에게 보냈다. 10월 30일 3시에 전두환은 27일에 체포한 김계원에 대한 수사가 있었음을 발표했다.

변론

김재규는 재판 내내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고 계획적인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1심 최후변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 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 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재규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서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차지철과의 분쟁이 있기 전까지는 박정희의 충신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급조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한편 공판 과정에서 박선호가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 문제를 말하려 하자 김재규는 이를 제지하였다. 김항규는 법정에서 박선호 과장이 대통령의 사생활 얘기를 꺼내려 하자 김재규가 제지하였다고 밝혔다.

 

미국의 박정희 제거 지령서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인했다. 주한 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근 2011년 1월 18일에는,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죽음
1979년 12월 18일 계엄보통군법회의(군사재판)에서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었다.1980년 1월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고 1980년 1월 28일 계엄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재판 과정에서 헌병 2명이 김재규를 비롯한 가담자들의 양측에 배치되어 함께 착석하였고, 공판장 양 끝에도 헌병과 보안사 병력이 배치되었다.

같은 해 5월 24일, 결국 서울구치소(1987년 의왕으로 이전되어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자리) 내 사형장에서 사형을 당했다. 향년 55세.

사후

그의 재산은 신군부에 의해 몰수되었지만 그 밖에도 여분의 재산이 존재하였다. 2005년에 언론 취재 결과 김재규의 사형 집행과 함께 재산이 몰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 김연희는 100억이 넘는 재력가로 생활하고 있었고, 장녀 김수진은 당시 한 사립대학 학장의 부인이었다.

김재규가 처형당하자 가족들은 연금 신청을 했다. 1982년 12월에 '내란죄의 경우 연금 지급을 제한해야 한다'라는 결론이 나와 1983년 6월에 이를 입법조치했다. 그러나 이미 신청한 김재규의 가족들은 불소급의 원칙에 따라 연금 혜택을 계속 받게 되었다. 김재규의 유족연금은 1992년 당시까지 매달 지급되고 있었고, 유족 연금은 김재규 재직 시 월급의 73%였다.한편 김재규는 내연녀와의 사이에서도 2명의 아들이 있다. 내연녀 장정이는 2008년 12월뇌졸중으로 향년 82세의 나이에 끝내 사망하였다.

 

 

평가

김재규의 암살을 놓고는 여러 가지 의혹이 존재하고 있고 평가도 다르다. 그간 김재규에 대한 대중사회의 평가는, 그가 민주화를 위해서 대통령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차지철과의 권력싸움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주류였다.이와는 반대로 2004년에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김재규 부장에게 명예 회복을 시도하는 등 10·26 사태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있었다.

 

위의 관점은 김재규의 행적에 대한 평가와 수사 결과 발표가 당시 전두환의 뜻대로 행해진 부분에서부터, 김재규의 개인적인 성향이 유혈 독재를 혐오하며 친 민주화 세력이었던 점, 박정희의 재선 당시 이번 출마를 마지막으로 할 것을 종용한 점, 유신 이후 박정희에게 여러 차례 실망감을 드러내어 그를 암살, 군부대에 유폐 시키려 이미 수차례 시도했던 점을 들 때 대통령 암살이 결코 우발적인 일이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며, 이러한 해석적 관점에 기반을 두어 그를 민주투쟁의 '의사'라 추숭될 여지도 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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