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발해

정효공주, 문왕의 넷째 딸, 총명하고 미모가 뛰어나다. 정효공주, 문왕의 넷째 딸, 총명하고 미모가 뛰어나다. 정효공주(貞孝公主, 757년 ~ 792년)는 발해의 왕족이자 발해 문왕의 네 번째 딸이었다. 정효공주에 대한 기록은 정효공주묘의 비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효공주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의 증손녀이자 발해의 왕녀이다. 그녀는 문왕의 네 번째 딸로 태어났는데, 정혜공주의 동생이기도 했다. 묘지명에 의하면 그녀는 총명한데다가 미모도 뛰어났다 한다. 나중에 결혼해서 딸도 낳았으나, 남편과 딸이 죽은 뒤에는 평생 수절하고 재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792년 6월 9일에 36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정효공주묘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는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 허룽시 룽터우 산 고분군 가운데 하나로, 793년에 만들어진 발해 초기 고분이다. 발해의 .. 더보기
발해 무왕, 처음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고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다. 발해 무왕, 처음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고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다. 무왕(武王, ? ~ 737년, 재위 : 719년 6월 ~ 737년)은 발해의 제2대 국왕으로 휘는 무예(武藝)이다. 연호는 인안(仁安)이다. 발해의 시조 고왕 대조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고왕은 몰락한 고구려의 장군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의 영주(營州)로 이주된 형편이었다. 즉위 고왕은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과 격돌, 크게 격파하고 동모산(東牟山)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 고왕이 719년 붕어하자 보위를 승계하고, 연호를 고쳐 인안(仁安)으로 하였다. 무왕은 즉위 직후부터 지속적인 영토확장을 꾀했고 726년 부여의 후계 국가인 두막루와 여러 말갈 부족을 발해로 병합하였다. 무왕은 727년 발해에서는 처음으로 일본에 사.. 더보기
성덕왕, 신라 중대, 하고(下古) 왕대의 국왕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으로 기록되다. 성덕왕, 신라 중대, 하고(下古) 왕대의 국왕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으로 기록되다. 성덕왕(聖德王, 691년 ~ 737년)은 신라의 제33대 왕(재위: 702년 ~ 737년)이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죽자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초명(初名)은 천중(天中). 휘(諱)는 융기(隆基)였으나 당나라(唐)로부터 현종(玄宗) 황제와 휘가 같다는 항의를 받고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702년부터 73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702년부터 708년까지 모후인 신목왕후가 섭정하였고 708년부터 737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내정 자식을 두지 못한 효소왕이 죽은 뒤 국인들에 의해 추대되었으며, 즉위 3년(704년) 여름 5월에 승부령(乘府令) 소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 더보기
대조영,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다. 대조영,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다. 고왕(高王, ?~ 719년, 재위: 698년 ~ 719년)은 남북국 시대의 북국인 발해(渤海)의 초대 국왕이며, 성은 대(大)이고, 휘는 조영(祚榮)이다. 고왕은 고구려의 장수 걸걸중상의 아들로서, 고구려의 유민이자 옛 고구려의 장수이다. 고왕과 발해에 관해 중국 측 기록인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으로서술하고 있지만,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본래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속말말갈의 한 일파라고 서술 되어있어 고구려와의 종족 관계를 모호하게 기록하였다. 한국측 기록인 삼국유사에 인용된《신라고기(新羅古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고왕을 고구려 장수라고 기록하였다. 고구려 무장 당시 고구려(高句麗)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사망한.. 더보기
삼국사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金富軾)이 1145년(인종 23)에 완성한 삼국시대사이다. 현존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정치적 흥망 변천을 주로 기술한 정사체(正史體)의 역사서이다. 편찬 시기 고려 왕조가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귀족 사회의 동요를 수습하고 난 뒤, 앞 시대의 역사를 공식으로 정리한 정사(正史)로서 기전체로 편찬했다. 고기(古記)·유적(遺蹟) 혹은 중국의 여러 사서에서 뽑아 편찬, 간행하였다.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고 난 후에 임명된 벼슬에 감수국사(監脩國史)가 있어 이 무렵부터 편찬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설이 있고..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