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손병희

우금치 전투, 동학농민전쟁의 가장 큰 전투이자 승패의 분수령이 되다. 우금치 전투, 동학농민전쟁의 가장 큰 전투이자 승패의 분수령이 되다. 우금치 전투(牛禁峙戰鬪)는 동학 농민 운동 때 일어난 대전투로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농민군 해산과 진압의 원인이 되었다. 배경 조선 조정은 농민군이 밀고 들어오자 일본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등이 다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은 1894년 6월에 경복궁 쿠데타를 일으켜 친일 정권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공사로 임명했다. 그해 9월에 전봉준이 4,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작했다. 전봉준은 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과 합류할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김개남 대신 10월에 북.. 더보기
삼일운동, 비폭력 만세운동 삼일운동, 비폭력 만세운동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 또는 3·1 인민봉기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 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 또는 프랭크 스코필드를 포함 민족대표 49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 더보기
3·1운동 민족대표 33인 3·1운동 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서 각 15명, 16명, 2명씩 참가했다. 이 가운데 1919년 3월 1일에 약속 장소인 태화관에 나오지 않은 사람은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이다.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 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들중 손병희등은 복역 중 병사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일부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어..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