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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효소왕, 신문왕의 아들로 재위 11년 16세에 사망하다. 효소왕, 신문왕의 아들로 재위 11년 16세에 사망하다. 효소왕(孝昭王, 687년 ~ 702년 8월 24일(음력 7월 27일), 재위: 692년 8월 20일(음력 7월 3일) ~ 702년 8월 24일(음력 7월 27일))은 남북국 시대의 남국인 신라의 제32대 왕이다. 이름은 이홍(理洪, 후에 이공(理恭)으로 개명). 신문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이다. 691년(5세) 태자가 되었고, 692년 음력 7월에 (6세) 신문왕이 붕어하여 왕위에 올랐다. 692년부터 702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모후인 신목왕후가 섭정하였다. 생애 692년(재위 원년), 당의 측천무후로부터,<신라왕 보국대장군 행좌표도위대장군 계림주도독>에 책봉됐으며 휘를 피하기 위해 좌-우이방부(理方府, 입법을 관할)를.. 더보기
감은사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완공하다. 감은사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완공하다. 감은사지(感恩寺址)는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에 있는 신라 시대의 절인 감은사의 터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역사 신라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나라를 더욱 굳게 지키기 위해 이 절을 짓기 시작했으며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고 불렀다. 발굴 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 더보기
광종, 평가와 비판, 노비안검법으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양민들을 석방하다. 광종, 평가와 비판, 노비안검법으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양민들을 석방하다. 광종(光宗, 925년 ~ 975년 7월 4일 (음력 5월 23일)은 고려 제4대 국왕(재위: 949년 ~ 975년)이다. 휘는 소(昭), 자는 일화(日華), 묘호는 광종, 시호는 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이다. 태조의 넷째 아들, 신명순성왕후의 셋째 아들로서 요절한 왕태, 정종의 동생이다. 비는 대목왕후 황보씨(皇甫氏)로 태조와 신정왕후의 딸로 이복누이이며, 후궁인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는 배다른 형 혜종의 딸이다. 949년 3월 동복 형 정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949년 광덕(光德), 960년 준풍(峻豊)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중국 후주로부.. 더보기
성덕왕, 신라 중대, 하고(下古) 왕대의 국왕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으로 기록되다. 성덕왕, 신라 중대, 하고(下古) 왕대의 국왕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재위한 국왕으로 기록되다. 성덕왕(聖德王, 691년 ~ 737년)은 신라의 제33대 왕(재위: 702년 ~ 737년)이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소왕의 친동생이다. 효소왕이 죽자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초명(初名)은 천중(天中). 휘(諱)는 융기(隆基)였으나 당나라(唐)로부터 현종(玄宗) 황제와 휘가 같다는 항의를 받고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702년부터 73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702년부터 708년까지 모후인 신목왕후가 섭정하였고 708년부터 737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내정 자식을 두지 못한 효소왕이 죽은 뒤 국인들에 의해 추대되었으며, 즉위 3년(704년) 여름 5월에 승부령(乘府令) 소판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 더보기
신문왕, 문무 관료전을 지급하였고 녹읍을 폐지하다. 신문왕, 문무 관료전을 지급하였고 녹읍을 폐지하다. 신문왕(神文王, ? ~ 692년, 재위:681년 ~692년)은 신라의 제31대 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정명(政明), 자는 일소(日怊).문무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왕비는 폐비김씨이고 후에 김흠돌의 난이 진압되자 궁에서 폐위되었고, 후에 일길찬 김흠운(金欽運)의 딸(신목왕후)을 맞이했다. 665년에 태자가 되었고, 681년 7월21일에 선왕문무왕이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삼국 통일 후에 국내 통치의 기반을 굳혀 왕권의 강화에 노력했다. 진골왕통의 세 번째 왕이었지만 그는 모계로는 진흥왕의 후손으로, 신문왕의 외조부김선품은 진흥왕의 손자였다. 즉위 직후에, 당나라는 아버지 문무왕의 관직과 작위인<개부의동삼사·상주국·낙랑군왕·신라왕>을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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