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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

규장각,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 문화정치를 표방하다. 규장각,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 문화정치를 표방하다. 규장각(奎章閣)은 조선 후기의 왕실 학문 연구 기관이자 왕실 도서관이다. 역대 임금의 시문과 저작, 고명(顧命)·유교 (遺敎)·선보(璿譜) 등을 보관하고 수집하였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변에 세워진 규장각 연혁 세조 때에 양성지가 임금의 시문을 보관할 규장각을 두기를 청하였으나, 실시하지는 않았다. 이후 숙종 때에는 작은 전각을 마련하여 ‘규장각’이라 이름하였으나, 직제는 갖추지 않았다. 정조가 즉위한 뒤 1776년(정조 1년) 음력 9월 25일에 창덕궁 금원의 북쪽에 규장각을 세우고, 제학·직제학·직각(直閣)· 대교(待敎)·검서관(檢書官) 등의 관리를 두었다. ‘규장’(奎章)은 임금의 시문이나 글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규장각은 .. 더보기
병인양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 병인양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 전쟁 병인양요(丙寅洋擾 )는 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적인 전쟁이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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