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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임견미, 시샘이 많고 음흉했으며 당나라 간신 이임보에 견주다. 임견미, 시샘이 많고 음흉했으며 당나라 간신 이임보에 견주다. 임견미(林堅味, ? ~ 1388년 1월)는 고려 말의 무신이다. 공민왕 초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속하여 공을 세우고 중랑장에 등용되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건적 침입 때 나주도병마사(羅州道兵馬使)로서 왕을 호종(扈從)해 1등공신이 됐다. 고려말 빈번했던 외적의 침입 때마다 군의 총책임을 맡았으며 특히 1368년 원나라 수도가 명나라 군에 의해 포위되는 등 중국 왕조 교체기의 고려 안보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던 시점에 안주 순무사를 맡았다. 이후 문하시중에 오르는 등 이인임과 권문세족의 편에서 권세를 누리다가 1388년 이성계에 의해 제거됐다. 생애 고려의 무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임언수(林彦修)의 아들이다. 부친 임언수가 군.. 더보기
우왕, 조선시대에 편찬 된 <고려사> 우왕을 신돈과 반야의 자식으로 규정하다. 우왕, 조선시대에 편찬 된 우왕을 신돈과 반야의 자식으로 규정하다. 우왕(禑王, 1365년 7월 25일 (음력 7월 7일) ~ 138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 ~ 1388년)이다. 우왕의 아명(兒名)은 모니노(牟尼奴)로, 공민왕의 서자(庶子)이자 외아들이다. 그의 생모는 훗날(우왕 즉위년) 순정왕후(順靜王后)로 추존된 궁인 한씨로 포고되었다. 1371년(공민왕 20년)에 7세의 나이로 비로소 입궐하여 태후전에서 지냈다. 1373년(공민왕 22년) '우(禑)'라는 이름(名號·諱)을 하사받았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작되었다. 1374년(공민왕 23년)에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10세의 나이로 훗날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이인임의 후원을 받고 등.. 더보기
요동정벌, 이성계 일파의 4불가론 요동정벌, 이성계 일파의 4불가론 요동 정벌(遼東 征伐)은 명나라가 철령 이북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하려는 것에 반발하여 고려가 요동을 경략(經略)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다. 그러나, 이는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져 고려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 역시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요동 문제 요동은 남만주(南滿州) 요하(遼河)의 동쪽 지방으로, 요동반도(랴오둥 반도)를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한민족(韓民族)과 한족(漢族), 북방 민족 사이의 쟁탈 지역이 되어 왔다. 본래 고조선의 영역이었으나, 고조선이 기원전 290년경에 연나라 장수 진개와의 전쟁에 패해 서쪽 경계가 2천리 동쪽으로 이동함으로써 고조선의 판도에서 벗어났다. 전국시대 .. 더보기
이인임,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다. 이인임,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다. 이인임(李仁任, ?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간신(奸臣), 권신權臣)이자 시인(詩人)이었다. 그는 이성계의 최대 정적 중 하나였다. 그는 한때 신돈(辛旽)의 문하에 있었으며, 홍건적과 원나라의 최유 등을 물리쳤고,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이성계와 최영에 의해 실각되었다. 이성계의 사위 이제의 백부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며 경상북도 출신이다. 호(號)는 승암(勝巖)이며 시호(諡號)는 황무(荒繆)이다. 생애 고려 경상도 성주군 고령현 성산면(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에서 대제학 이조년의 손자로 태어난 기록만 알려져 있는데 할아버지는 성산군 이조년(李兆年)이고, 아버지는 성산후 이포(李褒)이다. 본관은 .. 더보기
창왕, 폐가입진을 내세워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다. 창왕, 폐가입진을 내세워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다. 창왕(昌王, 1380년 9월 6일 (음력 8월 7일) ~ 1389년 12월 31일 (음력 12월 14일)은 고려 제33대 국왕(재위: 1388년 ~ 1389년)이다. 휘는 창(昌)이며, 거기에 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르는 명칭으로, 정식 시호는 없다. 이는 폐가입진(廢假立眞)과 연관이 있다. 후에 고려의 유신들이 윤왕(允王)이라 불렀으나 이는 비공식 시호인 사시(私諡)에 해당된다. 그밖에 후폐왕(後廢王)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위와 폐위 배경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우왕을 폐위시키고 9세의 나이인 왕창을 즉위시켰으며, 1389년 재위 1년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었다. 1389년 11월 아버지 우왕과 모의해 이성계를 암살하려 했다.. 더보기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2) 정도전, 역성혁명으로 민본정치를 꿈꾸다.(2) 석방과 교육활동 1377년에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 영주와 안동, 제천, 원주 등을 오가며 유랑하며 지냈다. 그 뒤 1381년 가을 거주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초려(草廬)를 지고 '삼봉재'(三峯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권문세족들은 정도전을 위험 인물로 보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이곳 출신 재상이 삼봉재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부 남촌(南村)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王某)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더보기
폐가입진, 이성계가 창왕을 내쫓고 공양왕을 옹립하다. 폐가입진, 이성계가 창왕을 내쫓고 공양왕을 옹립하다. 폐가입진(廢假立眞, 폐가립진)은 1389년에 고려(高麗)의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자 섭정(攝政)이었던 이성계(李成桂)가 창왕(昌王)을 보위에서 내쫓아 몰아 내고 공양왕(恭讓王)을 보위에 추대하여 옹립한 사건이다. 고려(高麗) 시대 말기인 1389년 11월 당시 고려(高麗)의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었던 이성계(李成桂)가 우왕(禑王)의 아들 창왕(昌王)을 보위에서 내쫓아 몰아 내고 고려 왕족 종실 출신의 공양왕(恭讓王)을 허수아비 군주로 추대하여 옹립였다. 그리고 1개월 후 1389년 12월 31일 우왕(禑王)과 그의 아들 창왕(昌王) 두 폐주를 모두 공민왕(恭愍王) 치세 말기인 1371년에 사형 집행된 고려의 불교 승려 겸 정치가 신돈(辛旽, 본관은.. 더보기
공민왕, 반원자주화, 개혁정치, 성균관을 재건하다. 공민왕, 반원자주화, 개혁정치, 성균관을 재건하다. 공민왕(恭愍王, 1330년 5월 23일 (음력 5월 6일) ~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2일), 재위: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다.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 호는 이재(怡齋)와 익당(益堂), 우왕 2년에 조정에서 올린 시호는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며, 같은 왕 11년에 명에서 받은 시호는 공민왕(恭愍王)이다. 충숙왕의 차남이며,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伯顔 帖木兒, 몽골어:、Bayan Temür)이다. 즉위 초반에는 무신 정권의 세력 기반을 혁파하고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선언하였으며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노국대장공주의 사후 개혁의지를 상실하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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