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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권율, 원균과의 갈등,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리다.(2) 권율, 원균과의 갈등,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리다.(2) 왜란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9년 그의 나이 63세 때 노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가, 그 해 사망하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이틀간 정사(政事)를 폐지하였다고 한다. 권율은 죽은 뒤 전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 중 전공을 세운 장군들에게 내려진 최고의 영예인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충장공(忠莊公)이 되었으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항복과의 관계 오성 이항복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집(영역)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철 .. 더보기
원균, 실록 기록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의 기록들 원균, 실록 기록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원균의 기록들 부정적 평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은 누가 옳은지에 관한 논의와 상관없이 조선 수군 지휘부의 분열을 의미했다. 국난의 위기에서 극심한 갈등을 빚은 두 사람 역시 이러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시사료를 보면 당대사람들이 원균이 용장이라고 주장하나 아군 병사들과 백성들에게는 가혹하게 굴며 외적만 보면 도주하 는 장수가 용장이 될 수 있는가에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으며 조정에 목을 보내는데 집착하고 공을 세우는데 욕심을 냈다 는 사료를 참고해보면 사실은 자기가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허풍을 떤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선조실록의 사관은 “탐욕스럽고 잔혹함이 지나치다”라고 평가했다. 실록 기록들 경상 우수사(慶.. 더보기
권율, 행주대첩, 왜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다.(1) 권율, 행주대첩, 왜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다. 권율(權慄, 1537년 ~ 1599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영의정 권철의 막내 아들이자 이항복의 장인이다. 임진왜란의 조선군 장수로, 왜란 당시 조선군 총사령관인 도원수로서 왜군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데 기여했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사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임진왜란 이전 1537년 후일 영의정을 지내는 권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상당히 유복한 가정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관직에 나아갈 생각은 않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다. 가족들의 권고에 뒤늦게 그가 .. 더보기
명량대첩,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있나이다." 명량대첩,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있나이다." 명량 대첩(鳴梁大捷) 또는 명량 해전(鳴梁海戰)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 또는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총 참여 전선은 333척)을 물리친 세계 전사에 빛나는 해전이었다. 배경 조선 수군의 재건 원균과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선조.. 더보기
임진왜란 전투기록 임진왜란 전투기록 출처 : 충무공 이순신 더보기
이순신의 생애에서 중요한 장면 묘사, 십경도 십경도 소년시절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 (음력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순신 사후 조카 이분이 쓴「행록」에는 “어려서 놀 때도 늘 전쟁놀이를 하는데 모든 아이들은 반드시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 두 형을 따라 유학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성공할 만도 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 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로 보아 이순신은 어렸을 적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용감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이순신의 어린시절 전쟁놀이를 하며 동무들을 이끄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청년시절 머리가 나쁘다고 탓하지마라. 이순신은 혼인 후, 장인 방진의 영향으로 무관이 되어 나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한다. 28세가 되던 해(157..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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