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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

마한,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 백제의 문화 기초가 되다. 마한,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 백제의 문화 기초가 되다. 마한(馬韓)은 고대 한민족의 54개 부족국가 연맹체이다. 마한은 삼한의 기간(基幹)으로서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 범위는 한강 유역(경기도)으로부터 충청·전라에 퍼져 있었으며, 목지(目支)·백제(伯濟) 등 54개국이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후에 부여 등 북방계 유이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백제(百濟)국이 마한세력을 통일했다. 개요 마한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던 삼한(三韓)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소국의 통칭이다. 마한은 서해에 접하고, 동쪽은 진한(辰韓), 남쪽은 변한(弁韓)에 접해 있었다. 한강 이남 서울남동부를 중심으로 했던 나라 등 54개국의 지역적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더보기
무령왕,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 무령왕,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다. 무령왕(武寧王, 462년~523년 6월 5일(음력 5월 7일), 재위: 501년~523년)은 백제의 제25대 국왕으로 성은 부여(扶餘)이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462년 태어났고 이름은 사마(斯麻) 또는 융(隆)이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백제신찬》에 따르면 무령왕의 아버지는 개로왕으로 그가 동생 곤지와 부인을 공유했다고 하나, 이것은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라는 설이 있다. 또한 《백제신찬》과 《일본서기》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자의 아들이고, 동성왕은 이복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키.. 더보기
개로왕, 비유왕의 아들, 무리한 토목공사로 백성들의 원망을 사다. 개로왕, 비유왕의 아들, 무리한 토목공사로 백성들의 원망을 사다. 개로왕(蓋鹵王, ? ~ 475년 9월)은, 백제의 제21대 국왕(재위: 455년~475년)이다. 근개루왕(近蓋婁王), 개도왕(蓋圖王)으로도 불린다. 이름은 경사(慶司) 또는 여경(餘慶)이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가수리군(加須利君)이라는 칭호도 있다. 비유왕의 아들로 부왕 사후 즉위하였다. 《삼국사기》는 455년에 즉위하였다고 했고, 《일본서기》는 《백제신찬》의 기사를 인용하여 기사년(429년)에 즉위하였다고 기록해 양자가 차이를 보이는데, 단순히 《일본서기》 기록의 오류로 보기도 하지만, 왕의 즉위가 다소 불안정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일본서기》는 429년에 왜에서 백제의 왕녀를 구하자 모니부인(慕尼夫人)의 딸.. 더보기
아신왕,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다. 아신왕, 고구려군과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다. 아신왕(阿莘王, 370년? ~ 405년 9월, 재위 392년 11월~405년 9월)은 백제의 제17대 국왕이다. 성씨는 부여(扶餘), 휘는 아신(阿莘), 아방(阿芳), 아화(阿花), 아미(阿美)이며, 침류왕(枕流王)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에 아신왕(阿莘王) 또는 아방왕(阿芳王)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에 아화왕(阿花王) 또는 아미왕(阿美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아신이 태어난 날 밤 기이한 광채가 사방을 뒤덮었다고 한다. 침류왕이 죽었을 때, 그의 나이가 어려 숙부인 진사왕이 대신 즉위하였으나 392년 진사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아버지 침류왕이 죽을 때 아신왕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숙부인 .. 더보기
근초고왕,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다. 근초고왕,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다. 근초고왕(近肖古王, ? ~375년, 11월 재위: 346년 9월~375년 11월)은 백제의 제13대 국왕이다. 이름은 중국의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 일본의 《고사기》에는 조고 왕(照古王), 《일본서기》에는 초고왕(肖古王) 등의 이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신찬 성씨록(新撰姓氏録)》에는 속고 왕(速古王)으로도 불린다. 근초고왕은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차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체격도 아주 크고 용감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임에도 차기 왕으로 지목되어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근초고왕은 남으로 전라도 지역까지 마한 54개 연맹체 전체를 통일하였고, 북으로.. 더보기
칠지도, 백제 왕세자가 왜 왕에게 하사한 칼 칠지도, 백제 왕세자가 왜 왕에게 하사한 칼 칠지도(七支刀)는 일본 나라 현 덴리 시 이소 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길이 74.9cm의 양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로 칼에는 표면(앞면)에 35자, 이면(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X-레이 촬영 결과 앞면에 十(십) 자가 숨겨져 있음이 발견되어 1자가 늘었다.) 명문(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해석 문제는 광개토왕릉비와 더불어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소 노가미 신궁에서 ‘욱 차모(六叉鉾)’라는 명칭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1873년 신궁의 궁사에 의해 명문이 발견되었고, ‘칠지도’로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더보기
임나일본부설,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한 임나일본부는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 임나일본부,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한 임나일본부는 공식적으로 폐기된 학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또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 임나지왜재(任那之倭宰),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說)는 4세기 ~ 6세기에 왜국이 한반도 남부 지역에 임나(가야의 일부)에 통치기구를 세워 한반도 남부 지방의 일부를 다스렸다는 학 설이다. 일본인 학자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주장했다. 개요 이 학설은 크게 3가지 사료로 나뉘어 생각되며, 이는 391년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 《일본서기》에 진구 황후 편에 신라와 백제가 조공을 바쳤다는 내용의 기사, 백제의 칠지도 명문이다. 이 가운데 특히 8세기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임나일본부의 실재 여부나 그 기능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많은 이 견이 있다. 2010년, 한일역사공.. 더보기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 관산성에서 신라군 도도에게 죽다. 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 관산성에서 신라군 도도에게 죽다. 관산성 전투는 554년 백제와 신라가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충북 옥천)에서 싸워 신라군이 백제군을 무찌르고 백제 성왕을 죽인 전투이다. 그 뒤 양국관계는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관계가 계속되었다. 551년에 나제 동맹(433~553)을 맺고 있었던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남평양을 공격해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552년 고구려와 몰래 동맹을 맺고 553년 백제를 기습공격해 백제의 한강 유역까지 빼앗았다. 이에 성왕은 554년 태자 부여창(훗날 백제 위덕왕)에게 군사를 주어 신라를 치게 했다. 백제군은 태자 부여창이 지휘하는 백제의 주력군 말고도 가야에서 동원한 군사와 왜(倭)의 원병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일본서기》긴메이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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