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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원광, 세속오계, 진평왕의 명으로 걸사표를 지어 수나라에 출병을 요청하다. 원광, 세속오계, 진평왕의 명으로 걸사표를 지어 수나라에 출병을 요청하다. 원광(圓光, 542년 ~ 640년)은 신라 진평왕 시대의 유명한 승려이자 학자이다. 세속에서의 성은 박씨이다. 중국에서 불경을 연구하고 강의하면서 이름이 높았던 원광은 신라로 돌아 온 후 《여래장경사기(如來藏私記)》 · 《대방등여래장경소(大方等如來藏經疏)》 등을 지어 신라에 새로운 불교 지식을 전하였다. 한편, 교화활동에 힘써 국민도덕 및 사회윤리를 선양하는 일을 도모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제정이다. 진평왕 30년(608년)에는 왕명으로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에 출병을 요청했다. 생애 원광의 생애에 대해서는 13세기 초에 만들어진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간략히 나와 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더보기
도화녀, 진지왕과의 사이에서 비형랑을 낳다. 도화녀, 진지왕과의 사이에서 비형랑을 낳다. 도화녀,도화랑(桃花娘, ? ~ ?)은 신라 진지왕(新羅 眞智王) 때의 미녀(美女)이다. 도화랑(桃花娘)은 신라 사량부의 골품(骨品) 신분이 없는 어느 민가(民家)에서 출생한 여자이며 처녀 시절부터 자색이 곱고 얼굴이 아름다운데다가 인물이 출중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신라 진지왕 김사륜(新羅 眞智王 金舍輪)이 즉위할 무렵에는 이미 결혼을 한 몸이었다. 그런데도 신라 진지왕은 도화랑을 금성 서라벌 궁궐로 불러들여 자신과 관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두 낭군을 섬길 수 없다며 버티었고 이에 진지왕(眞智王)은 도화랑의 목숨을 위협하며 강압하였다. 하지만 도화랑은 자신의 목숨이 달아나도 정절을 버릴 수 없다며 버티었다. 그러자 진지왕은 낭군이 없다면 자신과 .. 더보기
비형랑, 진지왕의 차남이자 서자, 귀신과 놀다. 비형랑, 진지왕의 차남이자 서자, 귀신과 놀다. 김비형(金鼻荊, 581년 ~ 몰년 미상)은 신라의 왕족으로 진지왕의 차남이자 서자로, 진평왕 때의 인물이다. 군호는 비형랑군(鼻荊郞君)이다. 실존인물이지만 그의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삼국유사》에만 서술되어있어 그것을 통해 생애를 추측할뿐이다. 생애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형은 진지왕이 사량부의 미인 도화부인(桃花夫人)과 사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579년에 진지왕은 도화부인을 불러 후궁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도화부인은 남편이 있다며 거절하였다. 그 해 진지왕은 폐위되어 죽었다. 2년 뒤인 581년, 도화부인의 남편이 죽자 진지왕의 귀신이 도화부인에게 나타나 사통하였다.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진평왕은 비형을 불러 궁중에 살게 하고 15세 때 집사.. 더보기
황룡사, 신라 제일급의 대찰,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다. 황룡사, 신라 제일급의 대찰,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되다. 황룡사(皇龍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사찰로 알려져 있으나,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황룡사는 9층 목탑과 장륙상(丈六像)과 더불어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유명하였다. 신라의 사찰로 553년(진흥왕 14년) 기공이 시작되어 569년에 완공되었다고 여겨지나, 566년(진흥왕 27년) 일단 준공되었다가 645년(선덕여왕 14년)에 완성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고종 25년(1238년) 에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현재 그 터인 황룡사지(皇龍寺址) 가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황룡사 황룡사(皇龍寺)는 신라의 제일급의 대찰이었다. 창건설화(創建說話)에 의하면 새로운 궁전을 지으려 하였으나 황룡(黃龍)이 나타나.. 더보기
무왕, 세력 균형과 중립 외교로 실리청책을 펼치다. 무왕, 세력 균형과 중립 외교로 실리청책을 펼치다. 무왕(武王, ? ~ 641년, 재위 : 600년 ~ 641년 음력 3월) 은 백제의 제30대 국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장(璋), 아명은 서동(薯童) 혹은 일기사덕(一耆篩德)이다. 법왕(法王)의 아들이라는 설과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재위 기간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는 한편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세력 균형과 중립외교를 통해 양쪽의 대결을 이용한 실리정책을 펼쳤다. 이와 더불어 왕권 강화와 왕권의 건재를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役事)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궁(泗沘宮)을 중수하였으며 익산을 중시해 이 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遷都)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또.. 더보기
지증왕,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다. 지증왕,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다. 지증왕(智證王, 437년 ~ 514년, 재위: 500년 ~ 514년)은 신라의 제22대 왕이다. 내물왕의 증손이며 복호 갈문왕의 손자이자 습보 갈문왕(習寶)의 아들이다. 전임 소지 마립간과는 6촌 형제간이었다. 법흥왕의 아버지로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라고도 한다. 502년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소를 길러 땅을 갈게 하였다. 이듬해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마립간 대신 중국식 군주의 칭호인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제도와 체제를 개편, 정비하여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 군, 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또한 한국의 고대 사회에서부터 전해지.. 더보기
화랑, 화랑도의 지도자, 자발적으로 조직해 애국운동을 전개하다. 화랑, 화랑도의 지도자, 자발적으로 조직해 애국운동을 전개하다. 화랑도(花郞徒) 또는 낭가(郎家), 풍류도(風流徒), 국선도(國仙徒), 풍월도(風月徒)는 신라의 청소년 심신 수련 조직이다. 왕과 귀족의 자제로 이루어졌다. 조직의 지도자는 국선(國仙)·화랑(花郞)·원화(源花 또는 原花)·화주(花主)·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나 ‘화랑’(花郞)이 보편적인 칭호이다.한국 고유의 사상과 도교, 불교, 유교가 합해진 이념에 따른 일종의 심신 수련 단체로 국가 차원에서 조직하거나, 지원하였다. 화랑은 화랑도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라 추측되고 소속된 청년들을 낭도라고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화랑의 제도적 설치는 《삼국사기》에 나타난 576년(진흥왕 37)의 기록으로서, 이 해에 진흥왕은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 더보기
선덕여왕, 최초의 여왕,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다. 황룡사 9층 목탑 복원도 선덕여왕, 최초의 여왕,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다. 선덕여왕(善德女王, ? ~ 647년 2월 17일 (음력 1월 8일)) 또는 선덕왕(善德王)은 신라의 제27대 군주(재위: 632년~647년)이며, 한국사에서 최초의 여왕으로 알려져 있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장녀이며 태종무열왕의 6촌 누나이자 큰이모이다. 632년부터 647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632년 을제와 김용춘이 잠시 순차적으로 대리청정하여 국정을 담당했고 같은 해 632년부 터 647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하였다. 생애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장녀, 《삼국유사》에는 형제자매 서열에 관한 기록 없이 진평왕의 딸로 기록하였다. 진평왕이 아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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