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보기

언어의 온도, 이기주

반응형

 

 

 

언어의 온도, 이기주

 

「 언어의 온도를 읽으며 작가가 참 예민한 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느꼈다.

글이 너무 조심스러워 읽는 독자의 마음도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눈물이 핑돌게 하는 문장과 몇 번을 되뇌어 생각하게 되는 시 인용구가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읽는 내내 마음의 온도는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따뜻했다.

특히, 「 언어의 온도」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

 

책속으로

어제 노트북을 켜고 ‘사람’을 입력하려다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고 보니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 세 단어가 닮아서일까. 사랑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사랑이 끼어들지 않는 삶도 없는 듯하다.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중에서

 

안주가 떨어질 무렵,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가 옮겨갔다.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친구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불온한 상상을 하게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상대의 ‘낮’은 물론이고 상대의 ‘밤’도 갖은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법이지. 때론 서로의 감정을 믿고 서로의 밤을 훔치는 확신범이 되려 하지. 암, 그게 사랑일 테지.”
철학 서적을 주로 기획하고 출간하는 출판사 사장은 이런 이야기를 보탰다. “흔히 말하는 ‘썸’이란 것은,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는 ‘확신’과 ‘의심’ 사이의 투쟁이야. 확신과 의심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하는 법이지. 그러다 의심의 농도가 점차 옅어져 확신만 남으면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중에서

글은 여백 위에만 남겨지는 게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도 새겨진다. 마음 깊숙이 꽂힌 글귀는 지지 않는 꽃이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때론 단출한 문장 한 줄이 상처를 보듬고 삶의 허기를 달래기도 한다.
---「긁다, 글, 그리움」중에서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분노를 대하는 방법」중에서

한 번은 여행과 방황의 유사성에 대해 생각한 적도 있다. 둘 다 ‘떠나는 일’이란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두 행위의 시작만 비슷할 뿐 마지막은 큰 차이가 있다. 여행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tour’는 ‘순회하다’ ‘돌다’라는 뜻의 라틴어 ‘tornus’에서 유래했다. 흐르는 것은 흘러 흘러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성을 지닌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언젠가는 여행의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목적」중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시선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자세히 응시하는 행위는 우리 삶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관찰 = 관심’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도 한다.
사람은 관심이 부족하면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다. 궁금할 이유가 없으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외면하는 것이다. “당신이 보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은, “그쪽에 관심이 없어요” 혹은 “뜨겁던 마음이 어느 순간 시들해졌어요. 아니 차가워졌어요”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곤 한다.
그래서일까. 돌이켜보면 관심이 멈추던 순간, 상대를 향한 관찰도 멈췄던 것 같다. 

---「관찰은 곧 관심」중에서

 

☞ 이전글

[책보기] - 지금 다시, 헌법, 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헌법 해설서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