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역사보기

홍범도,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리다. 홍범도, 봉오동 전투에서 120명을 사살하고 최대의 전과를 올리다. 홍범도(洪範圖, 1868년 10월 12일(음력 8월 27일) ~ 1943년 10월 25일)는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며,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다. 사냥꾼으로 활동하여 사격술에 능하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었다. 1943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76세로 사망하였다. 생애 평안도 평양 서문안 문열사 부근에서 출생하여 평안도 양덕과 평안도 자성에서 성장한 그는 청년 시절부터 머슴, 건설현장 노동자, 종이공장 노동자, 사냥꾼, 광산 노동자 등을 전전하였다. 의병과 독립군 활동 28세 시절이던 1895년경부터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더보기
봉오동 전투, 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다. 봉오동 전투, 1920년대에 독립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다.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는 1920년 6월 6일~6월 7일 만주에 주둔중이던 홍범도(洪範圖), 최진동(崔振東, 일명 최명록(崔明錄)), 안무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의 독립군 연합부대와 신민단 예하 이흥수, 한경세의 신민단 독립군 1개 중대가 연합, 중국 지린 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봉오동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 남양수비대 예하 1개 중대와 싸운 전투이다. 병력은 교전 당시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인 독립군은 천 2백여 명이었고, 일본군은 5백여 명 정도였다. 삼둔자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일본군 제19사단은 병력을 출병하여 간도 내의 독립군단 토벌에 나선다. 1920년 6월 7일 북로 제1군.. 더보기
러일전쟁, 러시아 제국은 정부의 무능을 드러낸 패전의 영향으로 2월 혁명을 겪다. 러일전쟁, 러시아 제국은 정부의 무능을 드러낸 패전의 영향으로 2월 혁명을 겪다. 러일 전쟁(러시아어: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일본어: 日露戦争 (にちろせんそう), 영어: Russo-Japanese War)은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무력 충돌이었다. 러일 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제국이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부동항으로, 여름에 주로 이용되었으며 여순 항(당시는 Port Arthur)은 연중 사용할 수 있었다. 청일 전쟁 이후인 1903년 8월에 진행되기 시작한 차르 정부와 일본 간 협상에서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주.. 더보기
이상설, 1907년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다. 이상설, 1907년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다. 이상설(李相卨, 1871년 1월 27일(1870년 음력 12월 7일) ~ 1917년 양력 3월 2일)은 조선(대한제국)의 문신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혹은 부재라고도 읽음)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1907년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이후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1년 권업회 창설과 1914년 러일전쟁 10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대한광복군정부 수립을 주관하여 정통령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생애 1870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생부는 이행우(行雨)였으나, 1876년 이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관직 생활 1894년 .. 더보기
한일신협약, 정미년에 강압에 의해 체결된 협약으로 한국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다. 한일신협약, 정미년에 강압에 의해 체결된 협약으로 한국 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하다.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일본어: 第三次日韓協約)은 1907(융희 1)년 7월 24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조약이 체결된 해가 정미년이었기 때문에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라고 부르며 제1차 한일 협약,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 등과 구분하기 위해 제3차 한일 협약(第三次韓日協約)이라고도 한다. 별칭으로는 정미협약(丁未協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제2차 을사 조약(第二次乙巳條約) 등의 별칭이 있다. 배경 헤이그 특사 사건(海牙特使事件)을 빌미로 일본 정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 경성에 파견, 한국 측이 을사 보호 조약을 위반하였다 하여 고종에게 압력을 넣어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더보기
만국평화회의, 전쟁 행위를 천명한 최초의 다국적 조약이며, 리버 법전을 기반으로 하다. 만국평화회의, 전쟁 행위를 천명한 최초의 다국적 조약이며, 리버 법전을 기반으로 하다.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 또는 헤이그 회담(Hague Conventions)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899년, 1907년에 2차례 열린 국제 평화 회담이다. 네덜란드는 17, 18세기에 해양 진출이 활발해져서 신흥 해양강국이 되었으며, 이러한 때에, ‘국제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로티우스를 배출한다. 이런 배경 하에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제 평화 회담이 열리게 된다. 1899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채택된 《육상전 법규와 관례에 대한 조약》(Convention respecting the Laws and Customs of War on Land)과 여기에 《육상전 법규와 관례에 대한 규.. 더보기
헤이그 특사 사건,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려 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려 하다. 헤이그 특사 사건( - 特使 事件, 문화어: 헤그 밀사 사건)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려 하였던 사건이다. 배경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소집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대한제국 황제의 뜻에 반하여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폭로하고 을사늑약을 파기 하고자했다. 헤이그특사는 만국 평화 회의에 을사늑약이 불평등조약임을 알리기 위해 파견되었다. 경과 고종은 1907년 4월 전 평리원 검사 이준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만국평화회의(정식 명칭.. 더보기
기유각서, 대한제국 사법 및 교도행정 위탁에 관한 각서 기유각서, 대한제국 사법 및 교도행정 위탁에 관한 각서 기유각서(己酉覺書)는 융희 2년(1909년) 7월 12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기유각서의 공식 명칭은 대한제국 사법 및 교도행정 위탁에 관한 각서로서, 공식 명칭 그대로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교도행정에 관한 업무를 일본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조약이다. 이 조약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실권이 대한제국 조선 주재 일본 통감부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 의해 전격 박탈되었다. 임진왜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조선과 일본의 에도 막부(江戶幕府)가 1609년에 체결한 기유약조와는 다른 조약이다. 체결 이 조약은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일본 제국에 넘겨준 것으로서 대한제국의 사법부와 재판소 및 형무.. 더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