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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하다. 정약용,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하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정약용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 더보기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다.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단종 1) 11월 10일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이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배경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단종이 즉위 당시 12세로 어렸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인 김종서가 조정의 인사권 및 정권과 병권을 쥐고 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을 통해 왕실의 중심점 역할을 해야 할 대비, 대왕대비 등의 부재 상황에서, 세종의 영특한 아들들.. 더보기
허준, 동의보감 천하의 보(寶)를 만들다. 허준, 동의보감 천하의 보(寶)를 만들다. 허준(許浚, [2013]은 조선 중기의 의관·의학자이다. 동의보감의 저자로 유명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관직은 숭록대부 양평군에 이르렀다. 용천부사(龍川府使) 허윤(許碖)의 둘째아들이다. 허준 생애 어린시절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허윤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그는 일찍이 글을 익혔으며, 다방면의 학문에 통달(通達)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유가(儒家),도가(道家),불가(佛家)를 어우르는 동양의 종합적 사상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허준의 학문적 영역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훗날 동의보감의 집필에 지대한 영.. 더보기
명량대첩,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있나이다." 명량대첩,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있나이다." 명량 대첩(鳴梁大捷) 또는 명량 해전(鳴梁海戰)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양력 10월 25일)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 12척 또는 13척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 133척(총 참여 전선은 333척)을 물리친 세계 전사에 빛나는 해전이었다. 배경 조선 수군의 재건 원균과 윤두수를 비롯한 일부 서인 세력의 모함을 받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三道水軍統制使)에서 파직당한 뒤 원균은 새로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일본 수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여 다수의 장병과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조선은 제해권을 상실하였다. 이에 선조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자 이순신을 다시 복권하여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선조.. 더보기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의 죽음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7년간의 전쟁이 끝나다! 노량해전, 이순신 장군의 죽음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7년간의 전쟁이 끝나다! 노량해전(露梁海戰)혹은 노량대첩(露梁大捷) 임진왜란 당시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수군이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대첩으로서,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배경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다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했다가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1597년에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공했다.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이다. 그러나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더보기
한산도 대첩, 조선 수군 일본수군을 학익진으로 크게 무찌르다! 한산도 대첩, 조선 수군 일본수군을 학익진으로 크게 무찌르다! 한산도 전투(閑山島 戰鬪) 또는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학익진 배경 1592년(선조 25)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7월 18일(음력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조선은 일본 육군에 계속 패전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 더보기
광해군, 실리외교를 펼친 광해군 현대에 와서 재조명되다. 광해군, 실리외교를 펼친 광해군 현대에 와서 재조명되다.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성은 이(李), 휘는 혼(琿),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로 책봉되었고,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고 군량미를 모으는 데에도 힘썼다. 임진왜란 동안 세자의 몸으로 부왕을 돕고 전쟁 승리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부왕의 인정은커녕 견제와 냉대를 당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우여곡절 끝에 1608년 왕위에 올랐다. 임진왜란의 뒷수습과 민생 안정을 위해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등용하는 듯 여러 노력을 기울였으며,.. 더보기
대동법, 조선시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가져오다. 대동법, 조선시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가져오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 비각 대동법(大同法)은 조선 중기인 광해군-숙종 시기에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이다. 토지의 결수에 따라 1결당 12두씩을 통일하여 부과하게 되었다. 양반과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데 100여 년의 시일이 소요되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들은 부담이 급증하게 되어 이들은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였다.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공(貢)이라 하는데, 대동법은 이것을 일률적으로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는 제도이며, 이때 걷은 쌀을 대동미라 한다. 대동법의 실시를 놓고 논란이 확산되었으며 김육, 김좌명, 김홍욱, 이원익 등의 찬성파 외에 안방준, 김집, 송시열 등..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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