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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이회영, 전재산을 처분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1) 이회영, 전재산을 처분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다. 이회영(李會榮, 1867년 음력 3월 17일(양력 4월 21일) ~ 1932년 11월 17일)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한국의 아나키스트 계열의 독립운동가이다. 장훈학교, 공옥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신민회의 창립 멤버였고, 서전서숙을 설립하였으며 일가 6형제와 함께 유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을 양성과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자, 상하이에서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였으며 1928년 재중국조선무정부공산주의자연맹, 1931년 항일구국연맹 등의 창설을 주도하였으며 국내외 단체와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1931년 9월에는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과 일본 .. 더보기
고종, 홍릉 황제릉의 양식 고종, 홍릉 황제릉의 양식 능의 구성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석물의 배치는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 되어 있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 더보기
영휘원과 숭인원 이야기, 담 하나를 경계로 대한제국을 보는 듯 하다. 영휘원과 숭인원 이야기 영휘원과 숭인원이 있는 천장산(天藏山)은 하늘이 감추었다는 이름이며, 한양의 주산 북악산의 한 줄기가 뻗어 내려온 곳으로 조선황실의 땅이었다. 천장산의 남쪽 자락에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은 대한제국(1897 - 1919)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 고종황제)의 황귀비인 순헌황귀비 엄씨(1854∼1911)와 의민황태자의 맏아들이자 엄귀비의 손자인 이진(1921~1922)이 모셔져 있다. 번잡한 청량리동에서 담 하나를 경계로 숲이 우거진 아담한 공간이 펼쳐지는데, 저물어가는 대한제국을 보는 듯 그 분위기가 고즈넉하다. 영휘원 엄귀비는 조선 철종 5년(1854) 11월에 평민 엄진삼(嚴鎭三)의 딸로 태어나 5살에 아기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명성황후 민씨의 총애를 받아 그를 모시.. 더보기
아관파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다. 아관파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조선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러시아 공사관 (1900년경) 명칭 1864년 조선 고종 1년 이후 러시아 제국을 한자로 ‘아라사’(俄羅斯)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관’(俄館)이란 러시아 대사관을 뜻하며, 당시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노서아’(露西亞)라고도 하기 때문에, 노관파천(露館播遷)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노서아'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1905년 대한제국 광무 9년 9월 5일 노서아-일본의 강화 조약 기록이 유일하며, 러시아 대사관을 ‘노관’(露館)이라고 칭.. 더보기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 암호명 '여우사냥' 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들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 암호명 '여우사냥'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 (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준비과.. 더보기
경복궁 향원정, 왕족의 사적인 휴식 공간 경복궁 향원정, 왕족의 사적인 휴식 공간 경회루가 사신을 접대하거나 국가적 경사를 맞아 잔치를 베푸는 공간이라면 향원정은 왕족의 사적인 휴식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인 힘이 느껴진다면 향원정은 아름답고 섬세한 여성미가 느껴지지요? 향원정의 모태는 취로정이에요. 세조는 취로정을 짓고 후원에 개간한 논농사를 둘러본 뒤 이곳에 들러 휴식을 하면서 백성들의 힘든 생활을 잊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지금의 연못과 정자는 고종 10년 건청궁을 지을 무렵 다시 조성한 것입니다. 향원정은 주돈이의 가운데 '향원익청'에서 빌려온 겁니다. 현존 건물로는 유일하게 6각형의 중층 정자입니다. 취향교, 연꽃 향기를 머금다. 장안당쪽에서 섬안의 정자쪽으로 길게 뻗은 다리는 취향교입니다. 연꽃 향기에 흠뻑 .. 더보기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 경복궁은 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보이기 위해 태조4년에 세워진 조선시대 최초의 궁궐로 '만년토록 큰 복을 누려 번성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광화문 광장이 조선시대에는 행정과 정치의 중 심거리였던 육조거리였다. 경복궁은 조선 초 200여년간, 조선후기 고종 때 의 법궁이었다. 안타깝게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타버린 후 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다가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원래보다 훨씬 더 크게 7000칸이 넘는 규모로 중건했다. 그 후로 고종 때에는 다시 법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910년 조선이 일본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한후 로 일제는 조선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말살시키기 위해 경복궁을 파괴하 기 시작했다. 특히, 191..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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