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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완풍대군, 이성계의 이복형,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반대하다 완풍대군, 이성계의 이복형,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반대하다. 완풍대군(完豊大君, 1330년 ~ 1388년 10월 23일) 또는 완산군(完山君)은 고려 시대 후기의 무신·군인·관료·시인 이며 환조 이자춘의 아들이자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으로 이름은 이원계(李元桂)이다. 그는 일찍이 무과와 문과에 모두 급제를 하였으며 홍건적의 난 이후 두 차례의 홍건적의 침략을 격퇴하였고, 군 원수로서 이성계, 변안렬 등과 함께 왜구의 침공을 물리쳤다. 고려의 충신이던 그는 이복 동생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반대했으며,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뜻을 알고 절명시를 남긴 뒤 음독자결하였다. 생전의 작위는 척산군(陟山君)과 완산군(完山君)으로,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시킨 공로로 척산군에 봉군되었고, 뒤에 다시 .. 더보기
제왕운기,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다. 제왕운기,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다. 《제왕운기》(帝王韻紀)는 고려 시대의 학자 이승휴(李承休)가 충렬왕 13년(1287년)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시로 쓴 역사책이다. 상·하 2권으로 출간되었으며, 단군부터 고려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기술했다. 공민왕 9년(1360년)과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각각 다시 간행되었다. 오늘날 유포된 책은 이 3간본을 영인한 것이다.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두타산 아래의 천은사(天恩寺)에서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성 《제왕운기》는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중국의 반고(盤古)로부터 금나라까지의 역대 사적을 264구(句)의 ‘7언시’로 읊었고, 하권은 한국의 역사를 다시 1·2부로 나누어, 시로 읊고 주기(註記)를 붙였다. 제1부에는 지리기(.. 더보기
기황후, 원나라 공녀로 원 혜종의 총애를 얻어 귀빈으로 책봉되다. 기황후(奇皇后, 1315년 - 1369년)는 원나라 혜종의 황후이다. 몽골명은 솔롱고 올제이 후투그이며, 시호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이다. 고려 출신의 여자로, 고려후기의 무신 기홍영의 증손녀이자 고려 고종의 사위인 기온의 종손녀였다.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 중의 한사람이었다고 추정된다.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황궁의 궁녀가 되었다가 원 혜종의 총애를 얻어 귀빈으로 책봉되고, 훗날 혜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하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정적관계였던 제1 황후 다나슈리가 역모죄로 사사되자 외국인은 정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재상 메르키트 바얀의 반대를 견뎌내고 제2 황후가 되었고, 1365년에 제1황후인 옹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 사망하자 정궁황후로 등극하였다. 이후 아들.. 더보기
이색, 정도전의 스승, 성리학을 사회 개혁의 지향점으로 지목하다. 이색, 정도전의 스승, 성리학을 사회 개혁의 지향점으로 지목하다. 이색(李穡, 1328년~1396년 경상북도 영해군)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劉敞)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부정적으로 보고 협조하지 않다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다. 그는 이종학(李種學)의 아버지이고 박상충(朴尙衷)의 손윗처남이며 박은(朴誾)의 외숙부이고 고려 말.. 더보기
전민변정도감, 권문세가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실각하는 원인이 되다. 전민변정도감, 권문세가의 반대에 부딪혀 신돈이 실각하는 원인이 되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고려 후기의 개혁 기관으로서, 권문세족이 토지와 노비를 늘려 국가 기반이 크게 악화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특별기구이다. 공민왕 집권 기에 신돈이 왕에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원해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려고 했다. 중기 이후 권신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많은 토지를 사유화했다. 이로써 농민은 땅을 잃고 과중한 과세에 견디지 못하여 유민(流民)이 되거나 노예로 전락하였다. 이에 원종 10년(1269) 처음으로 전민변정도감을 두.. 더보기
노국공주, 고국을 배척하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지지하다. 노국대장공주, 고국을 배척하고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지지하다. 노국대장공주 패아지근씨(魯國大長公主 孛兒只斤氏, ? ~ 1365년 3월 8일(음력 2월 16일))는 고려 공민왕의 적후(嫡后)이다. 원 순종(元 順宗·추존)의 손자인 위왕(魏王) 베이르 테무르(孛羅 帖木兒)의 딸로, 본명은 보르지긴 보타슈리이다. 공민왕이 지어준 고려식 이름은 왕가진(王佳珍)이다. 1365년(공민왕 19년)에 난산으로 사망했다. 시호는 처음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를 내렸다가 차후 원에서 내린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로 교체토록 하고, 결국 이를 합성해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로 했다. 우왕 때는 인덕태후(仁德太后)라 했다. 올바른 호칭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인덕.. 더보기
정동행성, 일본원정을 위해 원나라가 설치한 기관 정동행성, 일본원정을 위해 원나라가 설치한 기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은 원나라가 고려를 복속한 후에 설치한 출선기관으로 일본 원정을 준비하였다. 흔히 정동행성이라고 줄여서 부르며, 일본행성(日本行省)·정동성(征東省)으로도 불렸다. 개요 쿠빌라이는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 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출병 한다(원나라의 일본 원정). 1274년 제1차 일본 원정에서 대마도,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데에서 그친 원나라의 세조(世祖)는 1280 년(충렬왕 6년)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하고 제2.. 더보기
쌍성총관부, 공민왕,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다. 쌍성총관부, 공민왕,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1258년에 원나라가 함경남도 화주(和州 : 영흥)에 설치한 통치기구이다. 쌍성총관부는 동녕부와 함께 고려인의 배반으로 원나라에 직속령이 되는 영토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통치 기간이 100여 년간 유지되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주권 회복 및 영토 회복을 위한 북벌 정책의 핵심으로, 이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격 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설치 1258년(고종 45년)에 원나라의 별장 산길(散吉)과 보지(普只)가 동여진(東女眞)을 경유하여 장성(長城) 이남을 침공했다. 이들이 화주에 이르자 당시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주민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저도(楮島)에 들어가 지키다가 죽도 (竹島)로 이동하였다. 그..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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