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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양녕대군, 시와 서에 능했지만 부왕 태종에게 신망을 잃다. 양녕대군, 시와 서에 능했지만 부왕 태종에게 신망을 잃다. 부왕 태종과의 갈등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여색을 금하고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으라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부왕 태종이 여색을 밝히고 후궁을 들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가 들인 후궁을 태종이 내침으로서 부왕 태종과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1417년 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봤다가 발각, 이것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부왕 태종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또한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조선에서 붓을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난 김호생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사족 출신으로 붓을 만들었는데 호기심에 양녕은 김호생을 찾아가 그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몰래 대궐에 들어와 세자에게 붓을 만들게 하였다... 더보기
세종, 영릉,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 세종, 영릉,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 능의 구성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더보기
문종,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하다. 문종,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하다. 문종(文宗, 1414년 11월 15일 (음력 10월 3일) ~ 1452년 6월 1일 (음력 5월 14일), 재위 1450년 ~ 1452년)은 조선의 제5대 임금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휘는 향(珦)이며, 자는 휘지(輝之)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맏아들로, 조선의 왕 중에서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다. 문종은 세종대왕의 맏아들이자 소헌왕후의 소생 중 첫째로 출생하여 1421년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왕세자로 책봉된 다음해인 1422년에 조부인 태종이 세상을 떠난다. 젊은 나이에 일찍 혼인하였으나 첫 번째 부인이었던 휘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으려 온갖 잡술을 이용하다가 발각되어 폐위되었고, 두 번째 아내였던 순빈 봉.. 더보기
문종의 세자빈, 휘빈 김씨, 가죽신을 태워 비방을 쓰다 폐출당하다. 문종의 세자빈, 휘빈 김씨, 가죽신을 태워 비방을 쓰다 폐출당하다. 휘빈 김씨(徽嬪 金氏, 생몰년 미상)는 문종의 세자 시절 세자빈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 생애 판돈녕 김구덕의 손녀이자 상호군 김오문(金五文)과 그 아내 정씨(鄭氏)의 딸로 1427년 왕세자 향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나 세자는 세자빈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세자빈은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시녀 호초(胡椒)에게 민간에서 쓰는 갖가지 비법을 묻자 호초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 인의 신을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사랑을 받는다."고 대답했다. 세자빈은 평소 시기하던 궁녀 효동(孝童)·덕금(德金)의 신으로 시험해 보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다른 방법을 물었다. 호초는 대신들의 첩인 중가이와 하봉래에게.. 더보기
초계문신, 정약용 초계문신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다. 초계문신, 정약용 초계문신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다.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조선 후기 규장각에서 특별교육과 연구과정을 밟던 문신(文臣)들을 칭하는 용어이다. 이 제도는 세종때부터 시행되었던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며 그 운영 방식은 1781년 편찬된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에 규정되어 있다. 초계문신은 37세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선발하여 본래의 직무를 면제하고 연구에 전념하게 하며 1개월에 2회의 구술고사와 1회의 필답고사로 성과를 평가하게 하였는데 규장각을 설립한 정조가 직접 강론에 참여하거나 직접 시험을 보며 채점하기도 하였다. 교육과 연구의 내용은 유학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문장 형식이나 공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경전의 참뜻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40세가 되면 초계문신에서 졸업.. 더보기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의 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의 어제 서문과 본문에 해당 《훈민정음》(훈민정음, 訓民正音)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지은 책의 제목, 그리고 그 책에서 해설하고 있는 뒷날 한글로 불 리게 된 한국어의 표기 문자 체계를 말한다. 한글은 1443년(세종25년) 훈민정음 28자를 연구·창제하고 3년 동안 다듬고 실제로 써본 후, 1446년 음력 9월에 이를 반포하면서 조선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통하여 문자와 천지인을 바탕으로 하는 음양오행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모음은 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기본 모음'ㆍ · ㅡ · ㅣ'를 보면 'ㆍ'는 양(陽)인 하늘(天)을 본 떠 만 들고, 'ㅡ'는 음(陰)인 땅(地)을 본 떠 만들었으며 'ㅣ'는 음과 양의 중간자인 인간(人)의 형상을 본 떠 만.. 더보기
김종서, 6진을 설치하여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하다. 김종서 장군 묘 김종서, 6진을 설치하여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하다. 김종서(金宗瑞, 1383년 ~ 1453년 11월 10일 (음력 10월 10일)는 조선 전기의 문신, 무장, 정치가이며 단종의 충신 3 상신(相臣) 중 한명이다.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본관은 순천(順天)으로 도총제(都摠制)를 지낸 김추(金錘)의 아들이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원적지는 전라도 순천이다. 1405년(태종 5년) 식년문과에 동진사 급제하여,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 지평(持平)·집의(執義)·우부대언(右副代言) 등을 지냈다. 1433년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1435년 함길도 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를 겸직하면서 확장된 영토에 조선인을 정착시켰고 북방의 경계와 .. 더보기
한글날, 유래와 역사, 한글날 2013년 부터 다시 공휴일이 되다. 한글날, 유래와 역사, 한글날 2013년 부터 다시 공휴일이 되다. 한글날과 조선글날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0월 9일을 "한글날"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월 15일을 "조선글날"로 기념한다. 한글날이 대한민국에서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 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이를테면 김일성선집에 따르면 "조선글은 인민이 과학적인 글자를 만들었다"는 언급만 있을 뿐 세종대왕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없다. 훈민정음 언해 이 날에 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단다. 유래와 역사 《세종실록》에는 1446년 (세종 28년) 음력 9월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으로 쓰여 있다. 이를 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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