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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박해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되다. 황사영 백서 사건, 신유박해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되다. 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는 조선에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인 황사영이 중국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교구의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보고와 그 대책을 흰 비단에 적은 밀서(密書)이다. 신유박해에 대한 귀중한 사료로 인정되었다. 황사영은 경상도 창녕(昌寧) 사람으로 정약현(丁若鉉 : 정약용의 맏형, 이복형제)의 사위이다. 중국 천주교회 사제인 주문모(周文謨)신부에게 알렉시오(Alexis)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1791년(정조 15) 17세의 어린 몸으로 진사에 합격하여 시험관을 놀라게 하였고, 정조로부터 그의 학문적인 재능에 대한 칭찬과 학비를 받았다. 1798~9년경.. 더보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고조선~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나열, 가공인물도 포함되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고조선~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나열, 가공인물도 포함되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韓國을 빛낸 百名의 偉人들)은 박인호(박문영)가 작사, 작곡하여 1991년에 최영준, 노사사(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래로 발표한 노래이다. 한국의 역사인물을 주로 수식문과 함께 나열한 가사로, 대한민국에서 높은 대중성과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역사의 진행에 맞추어, 고조선을 시작으로 삼국 시대(고구려, 백제, 신라), 남북국 시대(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을 거쳐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인물을 대략적인 연대 순으로 5절에 걸쳐 수식과 함께 나열했다. 인물이 아닌 집단도 있으며 실존 인물 외에 가공의 인물도 포함되어 있다. 음절상의.. 더보기
정조, 수은에 중독되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독살설이 제기되다. 정조, 수은에 중독되어 사망에 이르렀다는 독살설이 제기되다. 홍국영의 득세와 몰락 1777년(정조 1년) 7월, 괴한이 경희궁에 침입하자 정조는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8월에 다시 괴한이 침입하다 잡혔는데 조사 결과 정조의 외척인 홍상범, 홍계능 등이 유배되어 있던 홍술해와 모의하여 반정을 꾀한 것이 들어났다. 홍국영이 이 사건을 책임지고 처리하였다. 홍국영은 이들이 추대한 은전군을 자진하도록 조치하고 해, 홍상범에게는 사형을 내렸으며, 홍계능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정후겸의 양모인 화완옹주는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이렇게 하여 정조 즉위 1년 안에 즉위에 반대하였던 세력은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만이 무사하였을 뿐 모두 제거 되었다. 이후 정조는 홍국영을 특별히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다가.. 더보기
정조, 왕권강화와 정치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다. 정조, 왕권강화와 정치개혁을 위한 노력을 하다. 정조는 홍국영의 실각 후 탕평책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 반대파에 둘러쌓여 있던 정조에게는 친위세력이 없었다. 정조는 자신의 뜻에 따를 문신을 육성하기 위하여 규장각을 설치하는 한편 군영을 개혁하여 국왕의 병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규장각 정조는 즉위 후 창덕궁 후원에 영조의 글, 어진, 유품 등을 모아 보관할 건물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하였다. 규장(奎章)은 28수의 규성(奎星)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규성은 문장(文章)을 관할한다고 여겨져 왔다. 규장각은 선대 왕의 유품을 보관하는 왕실박물관이자 왕실도서관으로서 중국의 사신이 가져온 선물도 이곳에 보관하였다. 세조와 숙종도 규장각을 설치한 적이 있다. 규장각에는 두 명의 제학(提.. 더보기
초계문신, 정약용 초계문신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다. 초계문신, 정약용 초계문신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다.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조선 후기 규장각에서 특별교육과 연구과정을 밟던 문신(文臣)들을 칭하는 용어이다. 이 제도는 세종때부터 시행되었던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며 그 운영 방식은 1781년 편찬된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에 규정되어 있다. 초계문신은 37세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선발하여 본래의 직무를 면제하고 연구에 전념하게 하며 1개월에 2회의 구술고사와 1회의 필답고사로 성과를 평가하게 하였는데 규장각을 설립한 정조가 직접 강론에 참여하거나 직접 시험을 보며 채점하기도 하였다. 교육과 연구의 내용은 유학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문장 형식이나 공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경전의 참뜻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40세가 되면 초계문신에서 졸업.. 더보기
신유박해, 박해의 진짜 이유는 남인 시파의 숙청이었다. 신유박해, 박해의 진짜 이유는 남인 시파의 숙청이었다. 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조선의 로마 가톨릭교회 박해 사건이다.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의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원인 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신해박해(1791년, 정조 15년) 이래 “정도(正道)인 유학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소멸시킬 것” 이라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승하하였다. 1800년 8월 23일(음력 7월 4일)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해의 진짜 이.. 더보기
정약용,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하다. 정약용,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하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정약용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 더보기
수원화성, 수원화성의 역사와 특징, 거중기 수원화성 수원화성 수원 화성은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에 옮기면서 축조한 성으로 거중기, 녹로 등 신기술과 신기재를 사용해 축조하였다. 화성은 군사적 방어 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 매우 뛰어난 동양 성곽 중의 하나로 평가 받는다. 또한 화성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필요를 절감케 된 서울의 남쪽 방어기지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극심했던 당쟁을 해결하고 강력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가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실현할 새로운 개념의 계획적 신도시 건설을 꿈꾸며 축조한 성이다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팔달문(八達門)과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長安門)을 포함한 4대문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화성행궁의 중심이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회..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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