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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창덕궁 돈화문, 궐내각사,규장각,옥당 창덕궁 돈화문 돈화문은 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 되었습니다. 돈화는 [중용]의 '대덕돈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들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돈화문은 처음에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어요. 문종 때 돈화문을 고치라는 왕명이 있었고 연산군 때 크고 높게 고치라는 왕명이 있었습니다. 창덕궁이 차츰 이궁에서 본궁의 구실을 하게 되자 정문을 보다 크고 위엄있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거라는 풀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궁궐의 정문이 3칸인데 비해 돈화문은 5칸이고 이층으로 크고 높게 지어졌습니다. 경복궁과 창경궁의 정문이 정전과 일직선상에 있는 것과는 달리 창덕궁의 돈화문.. 더보기
창덕궁, 궁궐중 유일하게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다. 창덕궁, 궁궐중 유일하게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다.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은 북악산 응봉의 산자락에 경복궁의 이궁인 '창덕궁'을 세웠습니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하여 창경궁과 함께 동궐이라고 불리죠. 법궁인 경복궁이 있는데 태종이 궁궐을 또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잡은 이방원은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을 꺼려했던 것입니다. 경복은 정도전이 왕이 일하기에 편리하게 설계를 했다면 창덕궁은 왕의 의도에 따라 설계해서 쉴 수 있는 후원을 아주 넓게 만들었습니다. 왕권이 강했던 세조도 후원을 2배 넓게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머물었습니다.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써 조선은 정.. 더보기
[경복궁] 강녕전, 왕의 생활공간 [경복궁] 강녕전, 왕의 생활공간 왕의 생활 공간이었던 강녕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좀처럼 휴가도 없었고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무를 보느라 바빴던 임금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했을까요? 향오문은 정무를 마친 임금이 사정전에서 나와 내전, 곧 강녕전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내전이 시작되는 문이 향오문입니다. 향오는 '5를 향해 들어가는 문' 입니다. 여기서 '오' 를 가리키는 것은 오복입니다. 오복이란 수, 부, 강녕, 유호덕 (덕을 베품), 고종명(편안한 죽음) 입니다. 강녕은 오복의 세 번째 덕목인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강녕은 오복의 중심이자 모든 복을 아우릅니다. 이렇게 뜻을 하나 하나 알고 지나가니, 평소에는 그저 많은 문 중의 하나였던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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