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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현덕 말수가 적었으며 늘 남을 공손히 대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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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현덕 말수가 적었으며 늘 남을 공손히 대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다.

 

한 소열황제 유비(漢 昭烈皇帝 劉備, 161년 음력 6월 7일 ~ 223년 음력 4월 24일, 양력 6월 10일)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재위: 221년 음력 4월 6일 ~ 223년 음력 4월 24일)이다. 현덕(玄德)이다.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에는 한나라의 황실 성씨였으므로 유황숙(劉皇叔)이라고도 불렸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유비는 어머니와 돗자리를 짜고 팔아 연명하였는데, 청년 후반대 시절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때 분연히 들고 일어나 동리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니, 이것이 그의 파란만장한 격동 후반생의 시작이었다.

 

유비의 생애

유비는 탁군 탁현(지금의 허베이 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이 고향인 사람으로, '한나라의 황손'이었다. 연의에서의 표현이지만, 그는 팔이 길어 그대로 뻗어 무릎까지 닿고, 귀도 남달리 커서 거울을 사용하지 않고도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상은 부처의 귀와 그밖에 특이한 모습을 조합하여 삼국시대 이후 기나긴 세월동안 민중의 바람이 만들어낸 영웅의 모습이다. 유비는 어려서 아버지 유홍을 여의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짚신과 멍석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집안 동남쪽에 높이 다섯길이 넘는 큰 뽕나무가 있어 그 모양새가 마치 황제가 타는 가마의 덮개처럼 보였는데,“이 마을에서 귀한 인물이 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아직 어려 철이 없던 유비는 나무에 올라 향리의 친구들을 내려다보며 자신도 이런 가마를 탈 것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했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집안어른 유원기는 어린 유비에게 주의하기를, "함부로 황제의 가마를 타겠다는 말을 하지 말거라. 구족이 멸한다."  집안어른 자경 유원기(劉原起)이 지원하여 그는 열다섯살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때 공손찬도 유비와 함께 공부했다. 그러나 유비는 독서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았고 개나 말 같은 동물들을 좋아하였고, 화려한 의복을 걸치거나 음악을 듣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소싯적부터 명마(名馬)를 감별할 줄 알았고, 항상 말수가 적었으며, 늘 남을 공손히 대하였고,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황건의 난장각(張角)은 청주, 유주, 서주, 기주, 양주, 연주, 예주, 형주 등으로 세력을 점점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후한말의 혼란했던 시기에 유비는 기꺼이 천하호걸과 교류했으므로 젊은이들이 앞다투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서도 관우, 장비와는 같은 침대에서 함께 잘 정도로 유달리 친하여 그 은혜가 형제와 같았다.

 

황건적의 난에서 형주 웅거까지

영제 말,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주군(州郡)에서 모집한 의병들을 이끌고 교위인 추정의 군대에 가담해 장순, 장거의 난을 진압하여 그 공적으로 중산국(中山國) 안희현위(安喜縣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내 독우(督郵)가 유비를 쫓아내려 하였으므로 유비는 그를 현의 경계까지 끌고 가 곤장 200대를 때린 후 떠났다.(독우는 사람 이름이 아니고 후한말에 있던 하급 관리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조정에서 내려보낸 일종의 감찰사에 해당되는 직책이었다. 그당시 안희현을 시찰하였던 독우는 평소 유비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후 단양에서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의 모병에 응하여 함께 행동하다가 하비에서 적을 무찌른 공로로 유비는 하밀승(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지만, 이내 그는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유비는 고당위(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어 현령으로 승진하였지만, 적에게 격파되어 공손찬에게로 달아났다.

 

공손찬의 휘하시절

공손찬은 유비의 동문으로 형제가 없었던 유비에게는 거의 친형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친밀한 존재였다. 공손찬은 유비를 조정에 천거하여 별부사마(別部司馬)에 제수되도록 조치하였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 (袁紹)와 싸우도록 하였는데, 그가 자주 전공을 세웠으므로 조정에 이를 보고하고자 표를 올렸고, 덕분에 유비는 평원의 상(相)으로 임명되었다. 이윽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하자 서주목 도겸(陶謙)이 전해에게 구원을 요청해 왔으므로 유비는 전해와 함께 도겸을 돕게되었다. 이때부터 유비는 전해 밑을 떠나 도겸에게 몸을 의지하여, 예주자사에 임명된 후 소패에 주둔하였으며, 도겸이 죽은 후에는 도겸의 유지를 받들고 주위의 권유를 받아 서주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하비의 모든 호족들이 유비를 반겼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일은 훗날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공손찬 사후

196년(건안(建安) 원년) 유비는 조조로부터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원술(袁術)과 대치하게 되어 하비성을 비우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하비의 호족들 중 한명이었던 성문도위 조표는 여포의 연합 세력의 한명이었던 진궁과 내통하여 배신하였다.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유비가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자, 여포는 유비의 처자를 유비에게 되돌려보내었고, 유비는 소패에 내몰려졌다. 그러나 소패에서 유비가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집하자, 여포는 이를 꺼림칙하게 여겨 유비에게 공격을 감행하였다. 유비는 패주하여 조조에게 귀부하였는데, 조조는 유비를 후대하여 예주목으로 삼았고, 유비가 소패에서 군사를 모아 여포를 견제하는 것을 지원하였다. 이에 여포고순을 보내 소패를 공격하였고, 조조하후돈(夏侯惇)을 지원군으로 보냈으나, 결국 유비와 하후돈고순에게 패배하여 다시 유비의 처자는 사로잡혀 여포에게 보내졌다.

10월, 이에 조조는 친히 여포를 정벌하여 유비와 함께 하비를 포위하였는데, 여포의 부장 후성, 송헌, 위속 등이 배신하여 여포를 옳아 맨 뒤, 조조의 군세를 성안으로 맞이하였다. 여포가 자신을 살려 쓰도록 조조에게 말하여 조조가 의심을 품자, 유비는 여포가 앞서 행하였던 패악을 조조에게 귀뜸했고 이를 잘알고 있던 조조도 이에 동의했다.조조는 여포를 교수형에 처하였다.

 

 

조조의 휘하시절

유비는 조조와 함께 허도(許都)로 귀환해 좌장군에 임명되었고, 조조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 조조의 참모 정욱(程昱) 등은 “유비는 영웅의 자질이 있고 민심을 얻고 있으므로 남을 섬길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여 죽일 것을 권하였지만 조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무렵 헌제의 국구인 거기장군 동승(董承)이 조조를 주살하라는 헌제의 밀칙을 받았는데, 유비도 은밀히 이 계획에 가담했다. 어느 날 조조는 유비를 식사에 초대해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놀라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따르면, 이때 천둥이 쳤기 때문에 유비는 그 탓으로 돌렸는데, 이것은 《삼국지연의》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술되었다. 그래서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탄로나기 전에 원술 토벌을 빙자하여 서둘러 조조 밑을 떠났다. 그리고 유비는 원술을 멸한 후 조조가 준 증표를 이용하여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하비를 점거하였다. 그는 곧 서주자사 차주(車胄)를 죽인 뒤. 를 하비에 남겨 성을 수비하도록 명한 뒤 소패로 돌아갔다. 이때 다수의 군현들이 조조를 배반하여 유비의 군세는 수만 명에 이르렀다. 유비는 세력을 키움과 함께 손건을 원소에게 사신으로 보내 조조에 대항하는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여기서 그는 황제였던 헌제를 만나는데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어느날 유비가 군웅이던 시절 헌제는 유비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유비가 자신과 성이 같자 그의 가계도를 조사했고 그가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유승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헌제 역시 경제아들인 정발왕의 후손이었다 그가 자신의 황친 인것을 알자 그를 유황숙이라 부르며 그를 굉장히 아꼈다고 한다. 유비역시 헌제를 위해 군사를 일으키기도 했고 헌제가 죽은 줄 알고 촉한 건국 후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고 헌제에게 효민황제 라는 칭호를 주기도 했다.

 

원소의 휘하시절

이때 조조왕충(王忠)과 유대(劉岱)를 보내 유비를 공격하나 그들은 패배하였다. 200년 조조는 친정하여 유비를 토벌하였는데, 유비는 패배하여 유비의 수하 장수들은 흩어져 유비는 홀로 청주로 달아났다. 당시 청주자사 원담은 유비가 예전에 무재로 조정에 천거한 사람이었으므로, 원담은 이에 보답하고자 군사를 보내 유비를 맞이하였으며 원소에게 이를 알렸다. 원소는 장수를 보내 유비를 영접하였고, (鄴)에서 2백 리(80km) 떨어진 곳까지 나아가 유비를 대단히 환영했다. 한편 전투에서 승리한 조조는 유비의 처자와 관우를 사로잡아 허도로 귀환했다. 이로부터 원소와 조조는 관도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여남의 황건적 유벽 등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원소에게 호응하자 원소는 유비와 유벽을 허 아래로 파견하여 약탈하였다. 이때 조조로부터 달아난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왔다. 조조가 조인을 보내 유비를 공격하자, 이내 유비는 원소에게 돌아갔다.

유비는 원소 밑을 벗어나고자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劉表)와 협공하도록 진언하였다. 이리하여 원소는 유비를 여남에 파견하여 황건적 공도의 무리와 합쳐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여남에 진을 쳤다. 조조채양(蔡陽)을 시켜 유비의 군세를 공격하도록 했지만 채양은 패배하였고 난전 중 전사하였다. 조조원소를 격파한 뒤 몸소 남하하여 유비를 격파하였다.

 

유표의 빈객

이후 유비는 유표에게 귀의하였다. 유표 역시 교외에서 직접 유비를 영접하는 등 유비는 상빈으로서 대우하였다. 유표는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도록 했다.

배송지가 《삼국지》에 주석으로 인용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주연 중 유비가 잠시 변소에 들렀는데, 그는 허벅지에 살이 쪄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그가 주연으로 돌아왔을때 그의 얼굴에 남겨진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그 이유를 묻자, 유비가 답하기를,“저는 말안장을 떠나본 일이 적기 때문에 허벅지에 살이 찌지 않았는데, 그런데 지금은 말에 오르지 않은지 일곱해가 되어 어느덧 허벅지에 살이 붙었고, 세월이 흘러 저는 노년에 가까운데 아무런 공적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탄스러워서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이것이 유명한 ‘비육지탄(脾肉之嘆)’이란 고사다. 또한 유표의 부하 괴월(蒯越), 채모(蔡瑁) 등이 연회 중에 유비를 살해하려고 하자, 유비는 적로를 타고 도망하였다. 단계를 만나 유비는 힘을 내라며 적로를 다그쳤는데, 놀랍게도 적로는 세길이나 뛰어올라 유비는 단계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배송지는 또한 이 일이 실제로는 없었을 것이라는 손성의 비판을 뒤에 덧붙였다.

 

삼고초려

서서는 제갈량을 추천하였는데, 이에 유비가 그를 세번 찾아간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제갈량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천하삼분지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유비에게 피력하였는데, 이를 들은 유비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제갈량을 시험해보고자 그가 형주를 취할 때 그에게 군수물자 조달임무를 맡겼는데, 공명은 이를 훌륭하게 해내었다. 관우장비는 유비가 제갈량과 가까워지는 것에 불만을 품게되었으나,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에 비유하며, 그들을 달랬다. 이것이 곧 수어지교라는 고사의 유래이다. 삼국지연의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큰 차이는 없으나, 위략구주춘추와 같은 사서의 내용을 보면 제갈량이 유비를 직접 찾아갔다고 써져있다. 그러나 이를 반박하고자 진수출사표를 인용하여 본전에 실었다. 제갈량은 소설인 삼국지연의와는 다르게 지략가의 면모보다 정치가로서의 역할수행을 하였다.

 

적벽의 싸움에서 삼국성립까지

한편 조조하후돈이전에게 유표를 공격하라 명을 내렸는데, 유비가 박망 지역에서 이를 막아낸다. 유비는 자기 진영을 불태우고 도망가는 것처럼 꾸미고 복병을 써서 그들을 완전히 격파했다.

삼국지연의에선 제갈량이 지휘한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박망파전투는 205년으로 제갈량은 없었던 시절이고 유비가 지휘하여 하후돈을 격파한것이다. 208년 조조가 북쪽에서 내려오니 이때 형주 주민의 상당수가 유비를 따라나서 하루에 겨우 10리(4 km) 정도밖에 행군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비에게 “먼저 행군하여 강릉을 지켜야 한다”라고 진언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지금 사람들이 나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이들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조조가 기병 5천 명을 급파했기 때문에 유비는 당양의 장판교에서 추격당해 크게 패하고 만다. 유비는 유표의 큰아들 유기(劉琦)가 있는 하구로 도망쳤다. 그 후 유비는 손권(孫權)과 동맹을 맺어 적벽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유기를 형주 자사로 천거하는 한편, 무릉, 장사, 계양, 영릉 등 4군을 평정하였다. 그 후 유기가 죽자 군신들은 유비를 형주자사로 추대했으므로 손권은 유비를 두려워해 자기 여동생인 손부인(孫夫人)과 결혼시켜 유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애 썼다.

211년 익주자사 유장(劉璋)이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하자 유장의 별가종사였던 장송(張松)은 유비로 하여금 장로(張魯)를 토벌하게 하자고 진언했다. 이를 받아들인 유장법정(法正)을 유비에게 파견했다. 그러나 실은 장송이나 법정 모두 유비를 익주의 새 주인으로 맞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촉의 지형, 병기, 인마의 적고 많음 등의 정보와 지도를 제공한 장송의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다. 드디어 유비는 부군사 중랑장 방통(龐統)과 함께 익주로 들어서고, 유장은 몸소 마중나와 맞이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 겸 사례교위로 천거하고 병사를 증강시켜 백수의 주둔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유비는 곧바로 장로를 토벌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인심 장악에 힘을 썼다.

211년 조조손권을 토벌하자 손권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므로 유비는 유장에게 1만 명의 병사와 군수 물자를 요청했다. 그러나 유장은 늙은 병사 4천 명과 요구한 군수 물자를 절반 밖에 보내지 않아, 이에 유비는 격노했다. 때 마침 장송은 “지금 촉 공략을 앞에 두고 어찌해서 떠나려는 것인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유비에게 보내려고 하는데, 형 장숙(張肅)이 이 사실을 유장에게 알려 장송이 처형된다. 이때부터 유비와 유장의 사이는 매우 악화되었다. 유비는 백수관을 지키는 양회(楊懷), 고패(高沛)를 참살한다. 유비는 지름길로 관중에 이르러서, 여러 장수들과 군사와 처자들을 인질로 잡고, 병사를 이끌고 황충(黃忠), 탁응 등과 함께 진격해 부성(涪城)에 도착하여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유괴(劉璝)·냉포(冷苞)·장임(張任)·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성에서 유비를 막게 했지만 모두 격파되어 패하여, 퇴각하여 면죽(緜竹)을 보전했다.

유장이 다시 이엄(李嚴)을 보내 면죽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했지만, 이엄은 부하들을 통솔하여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군대는 더욱 강해지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해 군 아래의 현들을 항복시켰고, 제갈량, 장비, 조운(趙雲)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 백제(百帝)성과 강주, 강양을 평정하였으며,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그리고 유비가 진군하여 낙성을 포위하는데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지키고 있었고, 공격 당한지 1년이 되었다.

214년 낙성이 격파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을 이끌고 성도를 포위하고 유장의 항복을 받아냈다. 유비는 익주 자사를 겸하게 되고, 유장의 옛 신료도 그대로 고관으로 취임시켰으며 백성들에게 전답과 집을 돌려주는 등 익주민들의 인심을 얻으려 하였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유비의 이런 조치로 인해 익주사람들이 화목해졌다고 하며 이로서 유비는 촉한의 기반을 구축했다.

215년 유비는 형주를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였으며, 결국 형주 동부의 강하, 장사, 계양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218년 유비는 마초(馬超)와 장비를 시켜 무도의 하변을 취하게 하고 그 곳 이민족들과 연계하여 무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조조조홍(曹洪)에게 군사를 주어 마초를 물러나게 한다. 유비는 양평관에 주둔하고, 219년 봄 군대를 이끌고 정군산에 진지를 구축해 하후연(夏侯淵)과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유비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크게 치게 하고 적군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공격, 하후을 무찔러 죽였다. 이에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나섰지만, 유비는 한중을 끝까지 사수하며 상용까지 공략했다. 그리고 같은해 7월 위왕 조조에 맞서 한중왕에 오른다. 같은해에 형주에 있던 관우의 조(曹仁)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다가 손권에게 배후를 찔려 참수당했다. 결국 오나라에게 형주를 빼앗기고 만다.

 

촉한 성립과 유비의 죽음

220년(위나라 황초 원년) 위왕 겸 대장군 대 승상 조비(曹丕)가 한 헌제에게 강제로 선양 받아 황제가 되었는데, 이 때 삼국지연의에는 헌제가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실제론 헌제 살해 소식은 물론 그릇된 소문이었지만, 삼국지연의에선 상당히 와전되었다. 그리고, 제갈량은 유비에게 황제로 즉위하도록 권했고, 221년 4월 마침내 유비는 황제로 즉위했다. 연호장무(章武)로 하고,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세웠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칭제를 권했지만, 전부사마 비시는 상소를 올려 “강대한 적을 아직도 이기지 못하고 있는데, 즉위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쉽지 않습니까? 옛날 한 고조께서는 초와 약정을 맺어, 진나라를 격파시킨 사람을 왕으로 칭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는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황제에 오르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삼국지 촉서 비시전). 이에 유비는 비시를 좌천한다.

유비는 손권관우를 해한 것에 분노하여 오나라를 정벌하려고 했었고, 장비마저 범강장달에게 살해당한다. 결국 유비는 황제에 오른 이후 직접 오나라 정벌에 나섰다. 위나라를 강하게 의식한 조운이 간했으나 유비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222년(장무 2년) 2월, 유비는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무릉에 다다른다. 유비는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여 오계 소수민족을 회유하고, 진북장군 황권(黃權)에게 장강 북쪽의 제군을 통솔하게 하여, 이릉에서 오군과 맞선다. 연의에서 유비는 75만 대군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지만, 실제 정사의 기록으로 추정하여 볼 때, 당시 유비가 이끌었던 촉한의 군세는 4만 ~ 8만 명 규모의 익주 본대와 형주 유랑군, 이민족의 연합군(총합 10~12만 가량)으로 추정된다.

6월, 육손은 병사들에게 띠풀을 소지하도록 하여 화공으로써 유비군을 공격하고, 형세를 갖춘 뒤 동시에 공격하여 장남(張南), 풍습 등의 촉장의 머리를 베고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마인산에 포진된 유비의 군대를 포위, 공격해 유비군의 진영을 붕괴시키는데 촉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여 죽은 군사가 8만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벌에 실패한 유비는 겨우 달아나 백제성으로 들어간다. 육손은 군사들을 이끌고 촉군을 계속 추격하였지만, 조비가 이를 알아채고, 오나라 강동 땅이 비어있는 틈을 타 오나라 본국을 공격하였기에 육손은 군사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8월, 유비는 군사를 거두어 무현으로 돌아온다. 10월, 손권은 위나라의 침공을 맞이해 백제성에 머물고 있는 유비가 다시 공격할 것을 우려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고 이에 유비가 응답하였다. 223년 4월 관우, 장비의 사망과 이릉전쟁으로 인해 병이 심해진 유비는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고, 이엄을 보좌로 삼고 영안궁에서 63살의 나이에 붕어(崩御)하였고, 8월에 혜릉(惠陵)으로 이장되었다. 그가 아렇게 영웅이된데에는 그의 일족인 유씨가문의 사람들의 도움도컸다 그가 가난하던시절 한 유씨가문 어른은 그를 친자식과 똑같이 키워주었고 유비가 실언을 하자 이놈아 황족이라는 놈이 그 무슨 실언이냐 라고 충고를 해주었고 그의 종친인 군웅 유표와 유장은 그가 도망가시절 그가 친척인 것을 알고 도움을 주었고 또 다른 종친이던 유대는 조조 휘하였는데 유비의 편을 들다 조조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또 황제였던 헌제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 상처를 준 것 역시 그의 가족인 유씨 가문이었다. 유장에게 배신을 당해 죽을 뻔 한 것 하지만 유비는 유씨 가문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품었다 자신을 배신한 유장의 아들을 용서하고 벼슬을 주었고 유표의 아들인 유기를 자신의 아들 처럼 아껴 촉한 건국 후 벼슬을 주었고 조조의 부하인 유대가 자신과같은 한 황실의 후손 인것을 알자 그냥 풀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을 키워준 황족 유원기의 자식들을 아꼈다고 한다. 또 다른 종친인 유파를 끈질기게 설득해 자신의 휘하에 두었고 고아였던 한 유씨 가문의 아이를 양자로 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군웅출신 유씨가문의 출신들의 후손들을 많이 우대했다. 그리고 황제인 유협이 사망하자 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배신도 당했지만 유비는 자산의 가족은 유씨 밖에 없다며 유씨들을 우대했고 평생을 한 부흥을 위해 싸웠다. 자신의 일족에게는 너그러웠지만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상당히 엄했다. 심지어는 도주할 때 자식들을 버리기도 했다. 그러자 한 신하가 일침 하기도 했다.

 

유비의 후손들

263년 촉한은 멸망했다. 그와 함께 유선과 그의 일곱 후손들은 모두 위나라 내지(內地)로 옮겨졌다. 그 후, 유선의 6남인 유순(劉恂)이 안락공직을 이었으나 영가의 난에 휘말려들어 유비의 적자손들은 절멸 당하였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받는다. 그 후, 동진(東晉)의 장수 환온(桓溫)은 성한을 공략, 멸망시켰는데 도중에 환온을 따라온 역사가 손성은 유비의 증손자이자 마지막 후예인 유현을 만났다고 한다. 그 후 유현의 소식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손은 중국 각지에 퍼져 촉한 소열황제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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