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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최만리, 한글 창제를 반대한 대표적 인물로 세종의 노여움을 사다. 최만리, 한글 창제를 반대한 대표적 인물로 세종의 노여움을 사다. 최만리(崔萬理, ? ~ 1445년 10월 23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자 철학자, 법학자이다. 본관은 해주, 자(字)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해주 최씨의 시조인 해동공자 최충(崔沖)의 12대 후손이고, 최자(崔滋)의 6대손이며 최하(崔荷)의 아들이다. 외할아버지는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지용수(池龍壽)이다. 생원시에 합격한 뒤 1419년(세종 1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과 집현전에서 오래 근무하였다. 1427년에는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집현전 부제학,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전기의 명신으로 청백리로 녹선되었으나, 세종대왕이 한글.. 더보기
정인지,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크다. 정인지,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서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공이 크다. 정인지(鄭麟趾, 1396년 12월 28일 ~ 1478년 11월 26일)는 조선 초기의 문신·성리학자이며 한글학자, 역사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하동,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정리, 편찬하였고 용비어천가의 작곡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사사하고, 1414년(태종 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선발된 뒤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하였고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 더보기
용비어천가,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악장이다. 용비어천가,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악장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조선 세종 때 권제와 정인지, 안지 등이 세종의 명을 받아 지은 악장·서사시이다. 정인지와 안지, 권제 등이 짓고, 성삼문과 박팽년, 이개 등이 주석, 정인지가 서문을 쓰고 최항이 발문(跋文)하였다. 1445년(세종 27년)에 지어 1447년(세종 29년)에 간행하였다. 한글 창제 후 첫 시험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글 문헌이며 악장이다. 모두 125장으로 조선 개국의 위대함과 시련을 노래했고, 그것이 하늘의 명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내용은 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 등 조선의 선대인 6대에 걸쳐 그 사적을 노래했다. 제1장, 제125장 등 10여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 장이 2절로.. 더보기
집현전,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다. 집현전, 서적을 편찬 간행하여, 한국 문화사상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다. 집현전(集賢殿)은 정이품아문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학문 연구 및 국왕의 자문 기관이자, 왕실 연구기관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위나라 이래 설치되어, 당나라 현종(玄宗) 때 완비된 기관으로서 이곳에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警籍)의 간행과 서적의 수집 등을 맡아 보게 하였다. 한국에도 옛날부터 이 제도가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集賢殿’(집현전)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1356년(공민왕 5년) 고려 공민왕이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집현전 학사를 두었다고 한다. 이후에.. 더보기
박팽년, 사육신 중 하위지와 함께 유일하게 친 후손이 존재하다. 박팽년, 사육신 중 하위지와 함께 유일하게 친 후손이 존재하다. 박팽년(朴彭年, 1417년 ~ 145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字)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학사로 활동했고, 관직은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손자 박일산이 생존하여 사육신 중 하위지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중종 때의 권신 박원종의 일족이기도 하다. 생애 조선 세종 때인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보인·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과 단종을 보필하였다. 세종 말년에 신숙주, 성삼문, 윤기견, 윤회, 김종서 등과 고려사절요, 고려사의 편찬과 간행에 .. 더보기
현덕왕후, 원손(단종)을 낳자마자 하루만에 사망하다. 현덕왕후, 원손(단종)을 낳자마자 하루만에 사망하다.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1418년 4월 17일 (음력 3월 12일) ~ 1441년 8월 10일 (음력 7월 24일))는 조선 문종의 왕비이다. 시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이다. 화산부원군 권전(花山府院君 權專)과 해령부부인 최씨(海寧府夫人 崔氏)의 딸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문종의 세자 시절 휘빈 김씨(1429년 7월 18일 폐출)와 순빈 봉씨(1436년 10월 26일 폐출) 이후 세 번째로 맞은 세자빈으로, 1441년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산후병으로 사망한다. 남편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에 추존되었다. 생애 원래 왕세자 향(문종)의 후궁인 승휘로 궁에 들어갔으며, 세자의 두 부인인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가 갖가지 비행으로 .. 더보기
단종, 노산군, 숙종 때 복위되어 단종으로 묘호가 정해지다. 단종, 노산군, 숙종 때 복위되어 단종으로 묘호가 정해지다. 단종(端宗, 1441년 8월 9일 (음력 7월 23일) ~ 1457년 11월 7일 (음력 10월 21일), 재위 1452년~1455년)은 조선의 제6대 왕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이고, 휘는 홍위(弘暐)이다. 1455년 숙부 세조의 정변으로 양위하였다가,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사사 혹은 교살 되었다. 폐위되어 죽어서 시호를 받지 못한 채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다가 이후 중종 때에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당했고, 숙종 대에 가서야 성리학자들의 건의로 정종과 함께 복위되어,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는다' 라는 뜻의 단종(端宗)으로 묘호가 정해졌으며, 정식 시호는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 더보기
신숙주, 단종복위운동 동참을 거절하다. 신숙주, 단종복위운동 동참을 거절하다. 사육신의 난과 단종복위운동 신숙주는 성삼문에게 사육신으로부터 세조 3부자 처형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명분상으로는 옳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명회나 권람 등에게는 이 사실을 고변하지 않았는데, 뒤에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김시습 등은 그를 추한 배신자와 변절자로 규탄하였고, 사림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사육신과는 결별을 결심했다. "자네와는 모시기로 한 주군이 달라져서 이제 가는 길도 어긋났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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