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강왕 신라의 제43대왕과 민애왕 신라의 제44대왕의 생애
희강왕
희강왕(僖康王, ? ~ 838년, 재위: 836년 ~ 838년)은 신라의 제43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제륭(悌隆)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인 김헌정(金憲貞, 후에 익성대왕(翌成大王)으로 추봉)이고 어머니는 포도부인(包道夫人, 후에 순성태후(順成太后)로 추봉)이다.
즉위 전
원성왕의 증손으로 그의 둘째아들 혜충대왕에 추봉된 김예영의 손자이자 김헌정의 아들이다. 836년 흥덕왕(興德王)이 사망하자, 아찬 김우징(金祐徵)과 조카인 예징(禮徵), 김양(金陽)의 지지를 받는 숙부 김균정과 서로 왕위 계승을 놓고 시중 김명(金明), 아찬(阿飡) 이홍(利弘), 배훤백(裵萱伯)의 지지를 받는 제륭이 대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균정이 전사하고 김양은 화살을 맞아 우징 등과 더불어 청해진의 궁복(弓福)에게 달아나 의탁하였다. 싸움에 이긴 제륭이 즉위하였고, 김명이 상대등(上大等)에, 이홍이 시중에 임명되었다.
즉위 후
왕위 계승전에서 왕을 지지한 김명을 상대등에, 이홍을 시중에 임명하여 권력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재위 3년째가 되는 838년 정월에는 옹립자인 김명, 이홍등이 군을 일으켜 왕의 측근의 귀족을 살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자신을 옹립한 귀족 세력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을 자각하여, 왕위에 있는것을 포기하여 궁중에서 목을 묶어 자살했다. 그 이후에 희강왕으로 시호를 받고, 매장하였고, 그 왕릉은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의 사적 제 220호가 비정 되고 있다.
민애왕
민애왕(閔哀王, 817년 ~ 839년 음력 1월 23일, 재위 : 838년 ~ 839년)은 신라의 제44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명(明)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인 김충공(金忠恭,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존)이고 어머니는 귀보부인(貴寶夫人,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존)이며, 왕비는 각간 영공(永公)의 딸인 윤용왕후 김씨(允容王后 金氏) 이다.
출생연도
현존하는 역사서에는 민애왕의 출생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민애대왕석탑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 보물 제741호,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23세에 사망하였다. 민애대왕석탑사리호는 863년(경문왕 3년) 경문왕이 민애왕의 명복을 기원하며 제작하였다.
國王奉爲 敏哀大王追崇 福業造石塔記 (중략) 伏以 敏哀大王諱肌 宣康大王之長子 今上之老舅 以開成己未之年太蔟之月下旬有三日 奄弃蒼生春秋二十三 葬▨星霜二紀▨▨▨▨▨惠▨▨▨▨▨至欲崇蓮坮之業於▨桐藪願堂之前創立石塔 (중략) 時咸通四年歲在癸未無射月十日記 (중략)
국왕은 삼가 민애대왕을 위하여 복업을 추숭하고자 석탑을 조성하고 기록한다. ··· (중략) 엎드려 생각컨대 민애대왕의 휘는 肌이며 선강대왕의 맏아들로 금상(今上, 경문왕)의 노구(老舅, 아버지의 외삼촌)이다. 개성(開成) 기미(己未, 839년) 정월 23일 창생을 버리니 춘추 23세였다. 장례 ▨▨ 치른 후 2기(二紀, 24년) ▨▨▨▨▨ 혜(惠)▨▨▨▨▨ 연화 대좌의 업을 숭앙하고자 하여 ▨ 동수(桐藪)의 원당(願堂) 앞에 석탑을 세우니··· (중략) ··· 함통(咸通) 4년(863년) 9월 10일에 기록하다. ··· (중략)
즉위전
835년(흥덕왕 10년) 2월 김균정(金均貞)이 상대등으로 취임하고 그의 아들 김우징(金祐徵, 제45대 신무왕)이 시중에서 물러나면서, 당시 대아찬이었던 김명(金明, 민애왕)이 시중에 임명 되었다. 흥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붕어하자, 김균정과 그의 조카 김제륭(金悌隆, 제43대 희강왕)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란이 발생하였다. 민애왕의 누이 2명이 각각 김균정과 김제륭과 혼인하였으므로 민애왕에게는 김균정과 김제륭이 모두 매형이 된다.
836년 아찬 이홍(利弘), 아찬 배훤백(裴萱伯) 등과 함께 제륭을 지지하여 왕으로 옹립하였다.
837년(희강왕 2년) 봄 정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838년(희강왕 3년) 봄 정월, 시중 이홍(利弘) 등과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의 측근들을 죽이고 왕을 핍박하여 궁중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게 하고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838년 이찬 김귀(金貴)를 상대등으로 삼고, 아찬 헌숭(憲崇)을 시중으로 삼았다. 2월, 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들어가 장보고에게 의탁하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병사를 요청하여군사를 지원받았다. 겨울 12월, 이 중 김양(金陽)이 평동장군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 도착하였다. 왕은 대감 김민주(金敏周)에게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게 하였다.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시켜 기마병 3천으로 돌격하게 하였는데, 적을 거의 모두 살상하였다.
839년(민애왕 2년) 봄 윤 정월, 김양의 군사가 밤낮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達伐, 대구)의 언덕에 당도하였다. 왕은 김양의 군사가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 대흔(大昕)과 대아찬 윤린(允璘)ㆍ의훈(嶷勛) 등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막도록 하였다. 김양의 군사가 또 한 차례 싸움에 크게 이겨서, 왕의 군사 중에는 죽은 자가 절반이 넘었다. 이때 왕이 서쪽 교외의 큰 나무 밑에 있었는데, 측근들이 모두 흩어지고 혼자 서서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 안으로 도망하였으나, 병사들이 찾아내어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하였다.
민애왕의 사망 날짜와 관련하여 《삼국유사》 왕력(王歷)에는 1월 22일, 민애대왕석탑사리호(敏哀大王石塔舍利壺)의 명문에는 1월 23일에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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