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왕 즉위한 지 181일 만에 사망하다. 문성왕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키자 암살하다.
신무왕(神武王, ? ~ 839년, 재위: 839년)은 신라 제45대 왕이다.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우징(祐徵)이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손자인 김균정(金均貞, 후에 성덕대왕(成德大王)으로 추봉)이고, 어머니는 진교부인(眞矯夫人, 후에 헌목태후(憲穆太后)로 추봉) 박씨(朴氏)이다.
즉위 전
흥덕왕의 3년(828년) 1월 대아찬(大阿飡)과 시중(侍中)에 발탁 되었지만, 831년 1월 수도 금성(金城, 경상북도 경주시)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시중이 면직되었다. 834년 1월에 다시 시중이 되었지만, 835년 2월에 아버지 김균정(金均貞)이 상대등(上大等)으로 취임하면서, 우징은 시중 직을 사임했다. 이 때에 후임 시중이 된 사람은 김명(金明)였다. 흥덕왕의 사후, 상대등 직에 있던 아버지 균정과 조카 김제륭(金悌隆) 사이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났다. 내란 중에 균정이 죽어 희강왕이 즉위하였고, 우징 등은 청해진 대사 장보고에게 무사히 달아났다. 그 후, 희강왕을 옹립 한 김명이 반란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고, 838년 1월 왕으로 즉위 하였고, 우징파는 동년 3월부터 민애왕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결과적으로 우징의 장군 김양(金陽)이 왕도에 도착하여, 839년 1월 19일에 민애왕을 시해했다. 우징은 왕의 의례로 민애왕의 시체를 매장하였고, 또, 고례에 준거하고 즉위식을 거행하여,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즉위 후에 왕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를 추봉 했다. 아들 김경응(金慶膺)을 태자로 삼았다. 또, 민애왕을 물리치는데 공적이 컸던 장보고를 감의군사(感義軍使)에 임명하였고, 식읍 천호를 받는 것과 동시에 장보고의 딸을 태자비로 맞이할 약속을 얻어 냈다. 839년 7월에는 희강왕 대로부터 보내지 않았던 당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치청(淄青,산둥성) 절도사에게 노비를 보냈다. 당의 문종은 이것을 듣고, 먼 곳에 온 사람인 것을 불쌍히 여겨 신라에 귀국시켰다. 같은 달(7월) 신무왕은 병에 쓰러져 23일에 사망하였다.「삼국유사」왕력에서는, 동년 11월 23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즉위한 지 181일만이며 신라 역사상 가장 짧다. 제형산의 서북으로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 왕릉은 경주시 동방동의 사적 제 185호가 비정 되고 있다.
문성왕
문성왕(文聖王, ? ~ 857년, 재위:839년 ~ 857년)은 신라의 제46대 왕이다. 성은 김(金)씨이고 이름은 경응(慶膺)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신무왕 김우징(金祐徵)이고, 어머니는 정계부인(貞繼夫人, 후에 정종태후(定宗太后)로 추봉)이다. 장남은 태자(太子. 실전)기 되고, 차남은김안(金安)이다. 첫째 고손자 김억렴(金億廉)은 고려 태조 왕건의 장인이고, 둘째 고손자 김효종(金孝宗)은 경순왕의 생부가 된다.
생애
839년 7월에 즉위 하면서, 8월에는 대사의 직을 수행하는 동시에 선대의 신무왕에게의 협력의 공이 컸던 장보고에게 장군의 관직을 하사했다. 845년 3월에는, 신무왕이 장보고와 약속되어 있던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서 맞아들이려고 했지만, 중앙 귀족이 아닌 장보고의 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싫어한 중신의 반대가 있어 중지했다. 이것을 원한으로 생각한 장보고는 846년에 청해진(전라남도 완도군)에 반란을 일으켜, 왕은 장군의 염장(閻長)을 보내고, 장보고를 암살을 한다. 신무왕과 함께 문성왕 자신은 왕의 위엄의 회복과 지방 세력과의 결합을 도모해 왕권의 안정화를 완수하려고 했고, 왕도 금성(경주시)에 한정된 골품제에는 중앙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위는 확립하고 있어, 지방 통제를 반성하는 일 없이 권력 투쟁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41년에는 일길찬 홍필(弘弼)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에 피하여 잡지 못했다. 또, 847년 5월에는 이찬 김양순(金良順)과 파진찬 흥종(興宗)이 반란을 일으켰다. 849년 9월에도 이찬 김식(金式)과 대흔(大昕)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토벌하여 죽였다.840년에는 당의 문종이 홍여사에 머물고 있던 신라의 인질, 학생 아울러 105명의 귀국을 허락했다. 또 841년 7월에는 무종이 먼저 입당하고 있던 신라 관료 김운경(金雲卿)을 치주장사(淄州長史)에 임명해 신라에 귀국시켰다. 이러한 일은 「 구당서와 신당서의」신라전이나 「당회요」신라전에 기사가 있고,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느 김운경을 사자로 보내 당의 무종이 문성왕을<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시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왕>에게 책봉 하였고, 아울러 왕비 박씨를 책봉했다고 적고 있다.857년 9월에 병으로 쓰러졌다.847년 8월 김안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852년 11월 김안이 사망하자 숙부 김의정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말하고 7일 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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