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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 매제인 효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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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 매제인 효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다

 

신덕왕(神德王, ? ~ 917년, 재위: 912년 ~ 917년)은 신라의 제53대 이다. 성은 (朴), 이름은 경휘(景暉 또는 景徽)이다. 아버지는 선성대왕 박예겸(朴乂兼 또는 朴乂謙 혹은 朴銳謙)이고, 어머니는 정화부인(貞花夫人)이다. 그러나 다른 일설에 박예겸은 의부(義父, 혹은 양부)이고 친아버지는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된 각간 박문원(朴文元)이라고도 한다.

 

생애

912년, 매제이자 이복 손아랫처남인 선왕 효공왕 김요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효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후고구려궁예(弓裔), 후백제견훤(甄萱) 등의 세력에 침식당해 신라는 쇠퇴할 뿐이었다. 즉위한 해에 왕은 아들 박승영(朴昇英)을 태자로 세우고, 이찬 계강(繼康)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914년에 북쪽에서 궁예가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에서 정개(政開) 원년으로 고쳤다.

《삼국유사》는 신덕왕 즉위 4년인 을해(915년)에 영묘사(靈廟寺)의 내행랑에 까치의 둥지가 34군데, 까마귀 둥지가 40군데나 되었으며, 3월에는 두 번이나 서리가 내렸고 6월에는 참포(斬浦)의 물과 바닷물이 사흘 동안이나 싸웠다고 전하고 있다. 5년(916년) 가을 8월에는 후백제의 군주 견훤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후백제태봉의 세력에 침식되는 신라의 불운 속에서 917년에 붕어하였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에 있다.

 

능묘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왕의 사후 시신은 화장되었고 뼈는 잠현(箴峴)의 남쪽에 묻었다고 하였다. 경주시 남쪽 배동 배일산(拜日山)의 배리(拜里) 3릉 중 규모가 가장 큰 원형봉토분이 신덕왕의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고분은 산록에 위치하고 있고 내부 구조는 천정이 높은 횡혈식 석실분인 점, 그리고 분구의 규모와 호석(護石)의 축석 상태가 통일 전후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신덕왕릉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가계

《삼국사기》에는 신덕왕의 아버지는 정강왕(定康王) 대에 대아찬(大阿飡)을 지냈던 예겸(乂兼)이고(《삼국유사》는 부원父元),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며(《삼국유사》는 진화부인眞花夫人), 비 김씨는 헌강왕(憲康王)의 딸이라고 기록하였다. 아달라왕의 원손이라는 혈연이 친가쪽인지, 외가쪽인지는 《삼국사기》 본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의 기록이 서로 다른데,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신덕왕의 계보에 대해서 모계쪽 계보부터 수록하여, 어머니 진화부인(眞花夫人)의 아버지는 순홍(順弘) 각간(角干)으로 뒤에 성호대왕(成虎大王)으로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는 원홍(元弘) 각간이라고 기록하고서 원홍 각간의 기록 뒤에 아달라왕의 원손이라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에 신덕왕의 아버지라고 기록된 예겸에 대해서도 《삼국유사》는 의부로 기록되어 있고, 친아버지는 문원(文元) 이간(伊干)으로서 후에 흥렴대왕(興廉大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문관(文官) 해간(海干)이었다.

아들이 없었다는 아달라왕의 《원손》을 자칭한 것에 대해서는 신덕왕이 아달라왕과 모계로 이어진 자손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서 신덕왕의 성씨를 박씨라고 한 점에 대해 신덕왕의 누이가 효공왕의 비가 된 것을 계기로 김씨에서 박씨로 성을 바꾸었다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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