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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해 2.8독립선언을 기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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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독립운동을 위해 망명해 2.8독립선언을 기획하다.

 

조소앙(趙素昻, 1887년 4월 30일 ~ 1958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그는 일본 유학 중 무오독립선언서의 기초에 참여하였고, 1919년 이후 의정원정부에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한국독립당 당수 등으로 활동했고 김구·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이론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귀국, 줄곧 임시정부 법통성 고수를 주장하였고 김구, 이승만 등과 함께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김구, 김규식 등과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남북협상 실패 후에는 바로 노선을 바꾸어 대한민국 단독정부에 찬성하고 지지하였다.

1950년 제2회 국회의원 선거에 성북구에 출마해서 전국 최다득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1950년 6.25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으로 피랍되었다. 납북 후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도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불렸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에 협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교 학맥으로는 할아버지 조성룡의 문인이며, 종교 사상적 활동으로는 삼균주의 사상가이자 육성교 창시자였다.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이다. 본명은 조용은(趙鏞殷)이며 필명으로 사용하던 소앙이 후에 이름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소앙 조용은'으로도 부른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출생과 가계 배경

조소앙은 1887년 4월 30일경기도 파주군 월롱면에서 함안 조씨 가문의 아버지 조정규와 어머니 박필양의 6남 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는 조부 조성룡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1902년 상경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에 최연소로 입학하기 전까지 사서오경, 제자백가서등 한학을 공부하였다. 성균관 재학 시 그는 신채호를 알게되었고, 신채호와 함께 일본에 대한 '황무지 개척권 양도'에 반대하여 성토문을 작성하였다. 성균관 졸업 후에는 '황실 특파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 가츠우라 토모오 교장이 '한국학생들이 열등하다'는 민족차별적인 발언을 하자, 동맹파업을 주도해 항의했다. 중학교 졸업 후 1908년 3월 메이지대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 시 조소앙은 공수학회와 대한흥학회간부로서 유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1909년 12월에 일진회 성토문 기초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10년 8월에는 대한흥학회 차원에서 추진한 '합방'반대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1911년에는 조선유학생학위회 회장이 되기도 했는데, 이러한 그의 행보는 '요시찰 인물'로 끊임없이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1912년 3월메이지대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조선법률학교 교수로 근무했으며, 일제식민지 한국을 떠나 상해 임시정부에서 초대 외무부장관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의 브레인으로 활동했다.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베르그송을 만나 '시간'에 대하여 철학적 담론을 나눴으며, 러시아의 공산주의자 레닌과 영국 맥도널드 상원의원과 만나 사회주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조소앙의 집안은 전 가족이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한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성균관 수학

그의 백형 구심 조용하(1882~1932)는 함안 조씨 가문의 8대 종통의 종손으로 한성관립외국어학교한성관립불어학교를 졸업하고 관립범무학교 재학 중에 1901년 12월 독일 주재 대한제국공사관 서기로 임명되어 근무하면서 조소앙에게 서신과 책을 여러 차례 보내어 학업과 진로에 대해 조언을 하였다. 1902년 조소앙은 성균관의 경학과에 입학하여 사서삼경, 중국사, 본국사, 본북지지, 세계사, 세계지지, 산술, 작문 등을 배웠다. 성균관 재학시 단재 신채호와 교우했으며, 정부가 산림과 천택을 일본에 팔아넘기는 것을 반대하여 신채호 등과 함께 성토문을 작성하여 항의하였다. 그의 맏형이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었으므로 조소앙은 자연히 국제정세에 밝게 되었는데, 그의 맏형을 통해서 열강의 동향 등 국제정세를 비교적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일본 유학

성균관을 2년 만에 마치고 황실유학생 자격으로 1904년 11월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부립 제1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때 최린, 최남선과 동학하였다. 정칙학원에서 영어를 배운뒤 일본 메이지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재일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 창립을 주도하였다. 1910년 대한흥학회 주최 합방 반대 집회에 참여하였고, 조선의 윤치호, 함태영, 김규식 등에게 밀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밀사들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1911년 서원보, 전덕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일본 메이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때,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가던 이승만(李承晩)이 도쿄에 들려 강연을 하였는데, 이때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듣고 독립운동에 뜻을 품게 된다.

 

귀국 후 교육활동

1912년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신학교(儆新學校) 교사로 임용되고 양정의숙(養正義塾)에도 교사로도 초빙, 이후 경신학교양정의숙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대동법률전문학교 교사, 조선법학전수학교(朝鮮法學專修學校) 교사로도 출강하였다.

1913년 중국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여 김규식과 함께 독립운동에 본격 참여하였다. 1913년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 등과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다. 신규식·박은식 등과 함께 동제사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조하여 청년들을 교육했고, 진영사·황각 등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와 아시아 민족의 반일단체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

1915년 민족의 사상적 대동단결과 정신적 유도를 목적으로 종교인 육성교(六聖敎)를 창시하였다. 이는 단군 조선의 시조 단군 왕검은 '독립사상', 불타는 '자비제중(慈悲濟衆)', 공자(孔子)는 '충서일관(忠恕一貫)', 소크라테스는 '지덕합치(智德合致)', 예수 그리스도는 '애인여기(愛人如己)', 무함마드는 '신행필용(信行必勇)'으로써 연결하여 육성 일체를 구상하는 것이다. 그 해 귀국하여 청년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단체 결성을 준비하였으나 이듬해 병을 얻어 6개월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

퇴원 후 상하이로 다시 망명하여 동생 용주 및 중국 인사들과 대동당 결성을 준비하여 1917년 7월 상해에서 신규식, 박용만 등과 대동단결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해 대동단결의 선언을 기초하였다.

1918년 무오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1919년 2월에는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는데 가담하여 의군부 부령이 되었다. 신규식의 지시에 따라 일본 도쿄으로 파견되어 2·8 독립선언을 위하여 유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신익희, 윤치영, 여운홍 등 당시 일본에 유학중이던 유학생들과 김상덕 등과 함께 2·8 독립선언을 기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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