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분열 통치기 (문화 통치기, 1919년 ~ 1931년)
3·1 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 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파견을 기점으로 기존의 강압적 통치에서 회유적 통치로 그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 결과 일부 단체 활동 및 언론 활동이 제한적으로나마 허가되기 시작하였고, 아주 기초적인 초등 교육과 농업 교육만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민생 안정보다 회유책에 불과한 것으로, 친일파 양성을 통해 한민족의 분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한반도에서 식민 통치를 확립하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사이토 총독의 대책문에서 뚜렷히 알 수 있다.
1.핵심적 친일 인물을 골라 그 인물로 하여금 귀족, 양반, 유림, 부호, 교육가, 종교가에 침투하여 계급과 사정을 참작하여 각종 친일 단체를 조직하게 한다.
2.각종 종교 단체도 중앙 집권화해서 그 최고 지도자에 친일파를 앉히고 고문을 붙여 어용화한다.
3.조선 문제 해결의 성공 여부는 친일 인물을 많이 얻는 데에 있으므로 친일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주어 수재 교육의 이름 아래 많은 친일 지식인을 긴 안목으로 키운다.
4.양반 유생 가운데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 방도를 주는 대가로 이들을 온갖 선전과 민정 염탐에 이용한다. 조선인 부호 자본가에 대해 일·선 자본가 연계를 추진한다.
5.농민들을 통제 조정하기 위해 민간 유지가 이끄는 친일 단체인 교풍회(矯風會), 진흥회(振興會)를 두게 하고, 이들에게 국유림의 일부를 불하해 주고 입회권을 주어 회유, 이용한다. — 사이토 마코토 총독, 《조선 민족 운동에 대한 대책》
그러나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 수와 장비는 더욱 더 강화되었으며, 전문적으로 독립 운동가 색출을 위한 '고등 경찰제'를 도입하였다. 또 신문에 대한 검열·삭제·폐간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1925년 치안 유지법을 도입하여 민족 운동을 방해하였다. 또 오히려 일본은 문화 통치를 통하여 자신들을 한민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소수의 친일 관료들을 키워 한국인을 이간하여 분열시키고, 민족의 근대 의식 성장을 오도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문화 통치를 통하여 소수의 친일 한인 관료들을 키우는 한편,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탄압하는 등, 초급 학문과 농업 교육만을 갖고 이용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도움이 될 인간을 대량 양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민족주의 세력 내에서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민족 개량주의로 분화하여, 민족성 개조론이 등장하였고, 이는 자치 운동 (참정권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산미증식 정책과 공출
또 제1차 세계 대전을 통한 일본 공업 자본의 성장으로 잉여 자본을 통한 식민지 공업화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이때 제사, 면방직 등의 경공업 중소 자본의 투자가 증가하였고, 일부 일본 대자본의 투자가 있었다. 한편 한국인 자본의 회사와 공장 등의 성장도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한국인 노동자 수가 증가하였다. 이는 민족 간의 임금차별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노동쟁의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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