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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연합국이 태국과 추축국인 나치 독일 및 이탈리아 왕국의 지원을 받는 일본 제국과의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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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연합국태국과 추축국인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의 지원을 받는 일본 제국과의 전쟁이다.

 

태평양 전쟁, 또는 때때로 아시아-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 대전의 전역 중 하나로 태평양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아시아-태평양 전구와 남서 태평양 전구, 동남아시아 전역 등을 비롯한 태평양 일대의 넓은 지역과 중국, 그리고 만주 일대가 태평양 전쟁의 전역 범위에 해당한다.

중화민국일본 제국 사이의 중일 전쟁은 1931년 9월 19일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1937년 7월 7일 발발했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으나 이 때 당시 중국 홀로 일본에 맞서 싸우고 있었으며 일본에는 선전 포고를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41년 12월 9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중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발발 시기는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이 타이, 영국령 말라야와 싱가포르, 홍콩을 침공하고 미군 기지인 진주만과 웨이크 섬, 괌, 필리핀에 공격을 가한 1941년 12월 7일 또는 8일로 보고 있다.

태평양 전쟁은 연합국태국과 추축국인 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의 지원을 받는 일본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전쟁은 미국 공군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일본 본토 공습, 그리고 1945년 8월 8일 소비에트 연방만주 전략공세작전으로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을 유도했다. 공식적인 일본의 항복은 1945년 9월 2일 도쿄 만USS 미주리 (BB-63)에서 진행되었다. 일본군의 패배 이후 일본의 왕은 신이 아닌 인간 취급을 받았다. 전쟁 이후 일본의 지배 하에 있던 한반도와 타이완을 비롯한 식민지들이 독립하였고, 일본이 점령한 중국 대륙의 영토는 중화민국에 반환되었으며, 일본이 점령했던 태평양 지역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이 재점령하거나 국제 연합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소련 또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남사할린 지역과 쿠릴 열도를 병합하였다.

 

일본과 중국의 충돌

1932년 일본의 만주국 수립 이후 1937년 일본은 만주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하고 중국 내륙으로 진격할 준비를 마쳤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전투로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발발한 국민당중국 공산당은 서로 간의 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중소 비침공 조약을 체결해 중국에 대규모 지원을 시작했다. 1937년 8월, 총통 장제스는 상하이 전투에 정예군 30만 명을 투입했으나 3달 후 상하이는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지속적으로 중국군을 공격해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 대학살을 자행했다. 1938년 3월, 국민군은 타이얼좡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쑤저우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배하여 쑤저우가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다. 1938년 6월 일본군은 우한 전투에서 35만 명의 병력을 파견해 10월에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파네이함 사건 이후 일본의 행위를 비난했다.

1939년 일본은 러시아의 극동 지방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할힌골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몽골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후 일본은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접었고, 소련은 소련-일본 중립 조약 체결 이후 중국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1940년 9월, 일본은 중국의 유일한 외국과의 접경 지대인 인도차이나 일대를 포위하여 막기로 결정한다. 이 무렵 인도차이나는 비시 프랑스의 지배 하에 있었다.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은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나치 독일 및 이탈리아 왕국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추축국의 일원이 된다. 1944년까지 삼국은 서로 협조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일본군이 창사 전투와 쉬시산-자오양 전투에서 예상치 못하게 패배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후 중국 국민군은 대규모의 겨울 공세를 1940년 초 감행했으나 군사 및 산업적 수용 능력의 부족으로 1940년 3월 일본군의 반격에 무산되었다. 1940년 8월 중국 공산당백단대전을 감행해 승리를 거두었고, 일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삼굉 작전을 실시해 공산당의 인적·물적 자원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다. 1941년 분쟁은 국지전으로 바뀌었다. 일본은 중국의 북부, 중부, 그리고 해안 지역을 점령했으나 국민정부충칭을 임시 수도로 삼고 내륙으로 후퇴했으며 중국 공산당은 산시에 남아 저항전을 지속했다. 추가적으로 일본의 화북 및 화중 지배는 미약했다. 일본은 철도와 대도시만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교외 지역에는 군사 정부나 행정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은 중국군의 공격 및 철수 이후 재조직이 남서부 중국의 산악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했고, 중국 공산당은 화중 및 중국 동부 지역에서 일본군의 최전방 일대에 게릴라전과 사보타주를 지속했다.

일본은 왕징웨이 등이 이끄는 몇몇 괴뢰 정부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중국인들에게 잔혹성을 동반하거나 정부에 실제 권력을 양도하지 않거나 몇몇 적대적 정권을 지지함으로써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정부에 실용성 있는 대안을 만드는데 실패했다. 신사군 사건을 비롯해 전선 뒤에서는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이 영토와 국민을 두고 충돌이 일어나는 사건이 발생해 그들의 협력을 사실상 종결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전쟁에서 일본군은 상하이, 우한, 충칭과 같은 중국의 대도시에 전략폭격을 가했으나 1938년 2월부터 1943년 8월까지 5,000번의 공습을 수행했고, 이 결과 중국의 도시는 황폐해졌으며 최소 26만 명에서 35만 934명의 민간인 피해도 있었다.

 

일본과 서방권 국가의 충돌

1935년 초부터 일본의 군사 전략가들은 석유 매장량으로 인해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일본에 상당한 중요성이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1940년 이들은 이것을 인도차이나, 말라야, 필리핀으로 확장시켰으며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개념 하에 이를 편입시켰다. 일본군은 하이난 섬, 대만, 하이퐁 등지에 여러 군사 기지를 설치했고, 일본 군부는 공공연히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제독 타카하시 산키치는 미국과의 결전도 필요하다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 군국주의의 실패로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미국, 네덜란드 망명정부를 포함한 서방권 국가들은 석유 및 철강의 수출을 제재하며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의 군사적 활동을 이어나갈 시 천연자원의 수출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와 민족주의자들은 이러한 제재를 일본에 대한 공격이라 판단했다. 국내 소비 석유의 80%가 수입산 석유였던 일본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 언론은 군사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받아 미국,영국, 중국, 네덜란드의 포위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경제적 붕괴와 점령 영토에서 철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일본 정부는 1941년 4월이나 5월 사이에 서방권 국가들을 향해 공격을 감행하기로 계획했다.

 

남방 계획

일본이 분쟁 초기에 중요하게 생각한 목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영국령 말라야에 있는 경제적 자원을 확보하여 연합군의 제제 효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남방 계획이라 불리는 이 작전은 영국과 미국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결정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고, 일본은 필리핀 웨이크 섬, 과 같은 지역도 점령하고자 했다.

일본이 연합군의 반격을 막기 위해 중요 목표를 점령하고 방어선을 설치한다는 제한전이 일본의 계획이었으며 이는 연합국을 협상하게 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가 내재된 것이었다. 하와이 진주만에 주둔한 미국 태평양 함대에 대한 일본 제국해군의 공격이 방어선 수립을 완성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전쟁의 초기 단계는 2가지 작전으로 구분되었다. 첫번째 작전은 필리핀, 영국령 말라야, 보르네오, 버마, 라바울,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하기 위해 3개의 세부적인 군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두번째 작전은 뉴기니, 뉴브리튼, 피지, 사모아와 같은 남태평양의 도서 지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중앙태평양에서는 미드웨이 제도가, 북태평양에서는 알류산 제도가 전략적 요충지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중요 지역의 점령은 연합군이 반격을 하기 전에 방어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11월 이러한 계획들은 필수적으로 완결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고, 다음 달에 약간의 수정을 거쳤다. 일본 군사전략가는 영국과 소련이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고 있었고, 소련은 중립 조약을 체결한 것을 염두하여 기습의 성공을 예상했다. 일본 지도층은 미국과의 전통적 방식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대안은 그들 초기의 승리 이후 평화 협상에 나오는 것으로, 미국이 아시아에서 일본의 헤게모니를 인정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실제로 일본 총사령부는 수용가능한 협상이 미국 정부에 도달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공격권이 주어졌다면 공격들을 취소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 지도층은 미국과의 전쟁 수행을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얻은 경험에 기초하고 있었다. 두 전쟁은 약소국이었던 일본이 강대국을 꺾은 것으로 두 국가를 완전히 정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필리핀으로 이동하여 제국해군의 항로를 방해하지 않고, 자국 해군의 계획과 선언은 숨기기를 원했다. 만약 미국이나 영국이 선제공격을 한다면 약정된 계획은 그들의 위치를 고수하며 총사령부의 명령을 대기하는 것을 바뀔 수 있었다. 계획가들은 필리핀과 말라야 기습에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고 소련군에게 선제 공격을 가하는 최악의 상황도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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