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의 섭정과 권력장악으로 인사문제에 개입하다.
문정왕후는 1545년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아들 명종의 뒤에서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다. 역사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수렴청정은 어린 왕을 대신하여 정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멘토의 역할이었다. 정치경험이 없는 어린 왕이 정치에 대해 대신들과 토론한 내용을 같이 보면서, 조언을 하는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녀의 수렴청정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유관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반대하였는데 이를 빌미로 을사사화 때 제거한다.
명종이 즉위하자 대비 겸 섭정이 된 문정왕후는 축출된 윤원형과 윤원로를 불러들인다. 윤원형 형제는 문정대비를 등에 업고 음모를 꾸민다. 예조참의로 재등용된 윤원형은 형인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이들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중추부지사 정순봉(鄭順朋), 병조판서 이기(李芑),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 공조판서 허자(許磁) 등을 심복으로 하여,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鳳城君, 중종의 서8남 單)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한편 궁궐 밖으로는 인종이 승하할 당시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서 계림군(桂林君:瑠, 성종의 서3남)을 옹립하려 하였는데, 유관·유인숙 등이 이에 동조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은 근거가 없었으나 그가 윤원형 형제의 손을 적극 들어줌으로써 사태는 확장되었다. 이로써 윤임 일파를 제거하여 윤원형, 윤원로 형제가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1547년 9월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하였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분개하여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 중에는 특히 사림파계 인물들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서자이자 희빈 홍씨의 아들인 봉성군 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이때 함께 제거되었다.
권력 장악
그러나 정미사화 이후 윤원형과 윤원로가 싸우게 되자 친정 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는 그 중 윤원형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윤원형은 사촌인 윤춘년은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다음과 같이 형 윤원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가 올려지자 문정왕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윤원형의 손을 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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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삼가 살피옵건대 위장 윤원로는 성품이 간사하고 기질이 방자하니, 이런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한 가지 착함도 기록할 것이 없고, 만 가지 악한 것만 갖추어서 부귀를 생각하는 마음만 품었고. 군신의 의리는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 스승의 가산을 파산시키고 종친의 땅을 빼앗고 사람을 함부로 죽여 백성의 원성을 샀으며, 국모와 종사를 위태롭게 하였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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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윤원형, 윤춘년, 윤원로 등의 싸움에 끼어 든 누이 문정왕후는 결국 오빠를 죽이고 남동생의 손을 들어 줌으로써 싸움판을 종결시켰다. 이 일로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은 숙부 윤원형과 당숙 윤춘년에게 원한을 품고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이자 효령대군가문의 후손으로 새로운 권신이 된 이량 일파에게 붙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윤백원에게만큼은 동정, 호의를 베풀었다.
친 불교정책
그녀는 불교의 중흥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문정왕후의 뜻을 받들어 불교의 양종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말을 맨 먼저 내놓았던 영의정 이기도, 사림의 반대로 사태가 불리해지자 양종을 다시 세워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즉 양종과 선과를 설치하고 보우를 끌어들이는 데 중신들이 강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또 문정왕후능 명종 자신도 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1551년 그녀는 불교 중흥책을 추진하고 윤원형, 이기 등이 다시 이를 적극 동의함으로써 불교 중흥책이 추진된다.
이때 문정왕후가 내세운 명분은 사찰이 도둑의 소굴이 되니까 양성화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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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들은 날로 번창하고 군액은 날로 감축되고 있으며 사찰은 도둑의 소굴화가 되고 있는데, 하루 아침에 중들을 핍박하여 모두 환속하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니, 만약 이들을 통솔하는 자가 있으면 사찰로 은신하는 자들이 날로 늘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불교의 힘을 빌어 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중들이 너무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 폐단을 구제할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되어 끝내 고칠 수가 없으므로 오늘 굳이 내 뜻을 조정에 말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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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반대하는 편에서도 상소를 올려 맞불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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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변이 끊이지 않고 흉년이 계속하여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리다 못하여 모두 중이 되고 있는 터에, 하필이면 이교를 세워 통솔자를 두어 중이 되는 꼴을 막자는 것입니까? 오히려 양종의 설치로 중들의 세력이 확대되면 절로 들어가 이를 기피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아질 것이며, 그 피해가 날로 더 커질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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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 밖에도 불교의 폐단, 그 원리의 이단성, 토목 공사의 부당함, 그리고 보우의 비도덕적 행실을 들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왕후는 계속해서 불교 중흥은 어쩔수 없는 일이니 반대하지 말라며 호통쳤다.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목격한 대신들은 결국 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윤원형, 이기 등을 움직여 승과 부활과 선교 양종 부활을 위해 불교 종단에 대한 조사를 계속했다. 윤춘년이 윤원형의 뜻을 받들어서 문정왕후의 숭불 정책을 추진하고 있음을 눈치챈 대신들은 이 때에도 모두 그의 뜻을 받아들이며 어물어물 넘어가 버리고 만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녀는 승과를 부활시키고, 승려 보우를 가까이 하는 등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1550년 봉은사에 선종을 두고 봉선사(奉先寺)에 교종을 두게 하여 선·교 양종을 부활시켰다. 한편 윤원형(尹元衡)·상진(尙震)과 더불어 300여 사찰을 국가공인 정찰(淨刹)로 하고,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 동안 4,000여 명의 승려를 뽑는 한편, 승과시(僧科試)를 부활시켜 휴정(休靜)·유정(惟政) 등을 발탁했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그에게 병조판서직을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또한 오라비의 첩이지만 같은 불교 신자이기도 했던 정난정을 아꼈다. 하지만 이는 성리학자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고 사후 그녀에 대한 악평의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문정왕후가 죽고 난 뒤 불교는 보우가 요승으로 몰려 귀양갔다가 살해당하는 등 다시 탄압받게 된다.
그녀의 불교 중흥책에 유교 사상가들의 반발은 극심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를 강하게 밀어붙이자 명종도 이를 통제하지 못한다. 후일 그녀가 죽은 날 사신들의 논의를 보면 "불사를 숭봉함이 한도가 없어서 내외의 창고가 남김없이 다 고갈되고,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 받고 백성의 전지를 마구 빼앗았으며, 내수사의 노비가 제도에서 방자하게 굴고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이 못에 고기가 모이듯, 숲에 짐승이 우글거리듯 절로 모여들었다.(명종 20년 4월 6일자)고 했다.
그녀는 중종의 능침 주변에 흙을 성토하였는데, 이는 중종의 첫 능침자리의 땅이 낮아 문정왕후가 자신이 죽은 뒤 중종과 함께 묻히고자 했다. 그러나 정릉의 지대가 낮은데다가 해마다 비가 오면 흙이 쓸려가고 재실까지 물이 차게 되어 결국 보토(補土)에 많은 비용이 들고 효과가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보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1562년 그가 주지(住持)로 있는 봉은사(奉恩寺) 근처로 중종의 능을 이장(移葬)시켰다.
또한 무속 신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승과는 1565년에 폐지되는데, 보우는 윤원형과 정난정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음해인 명종 21년 4월 제주도에 유배되어 제주 목사 변협에 의하여 주살되었고, 그가 주창했던 선교 양종 선과는 양사에서 논의 끝에 혁파되었다.
인사 문제 개입
그녀는 정난정의 소개로 보우를 만나면서 그를 총애한다.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 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앉히는 등 해괴한 인사를 행하기도 했고, 선종과 교종을 모두 부활시키고 승과를 부활하는 한편 보우를 도선사 주지로 삼고 도대선사로 올려놓기도 했다. 왕의 고유 권한인 인사 문제에까지 적극 개입하게 되자 명종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된다.
명종은 그녀의 지나친 집권욕을 견제할 궁리를 한다. 명종은 그녀의 정권욕에 불만을 품고 한때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신진 사림 세력들을 등용시켜 외척들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히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명종은 실의에 빠지게 되고 의욕을 잃게 된다.
그녀는 여왕으로 부를 만큼 왕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친정 동생 윤원형의 폭압적인 권력 독점과 남용을 후원하고 있었고, 유교 사회를 표방하고 있는 조선에서 승복을 입은 승려를 병조판서에 올릴 정도로 정사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월권행위가 계속되자 명종을 포함해 대부분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그녀가 빨리 죽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상태 까지 가게 된다.
더구나 명종이 성인이 된 뒤에도 섭정을 계속했다. 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므로 그가 장성할 때까지 6년간 수렴청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1551년 명종이 만 18세로 법적 성인이 된 뒤에도 수렴청정을 계속했고, 1563년까지 섭정을 계속 하게 된다.
섭정에서 물러남
그러나 불교 중흥책에 대한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김종직은 수많은 문도들을 키워냈기에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희생되고 을사사화로 또다른 직계인 이언적계열이 숙청되었어도 사림 인사들은 계속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왕후는 이들의 비난과 반발을 계속 접하였다. 결국 이렇게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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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곧 이단이니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 다만 조종조 이래 아주 끊어 버리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유독 폐하랴. 내가 이 일 때문에 주상에게 부끄러움이 있으니, 이 또한 내가 나라를 위하는 성의의 일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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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의 불교 중흥책에 대한 반발은 계속 되었다.
1553년(명종 8) 18세가 된 명종에게 친정(親政)을 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윤원형 등과 협력하여 정사에 계속 관여하였다. 1563년까지 섭정으로 조정의 정사에 관여하였고, 섭정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수렴청정에서 손을 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 해 조정을 뒤흔들어놓기도 했다. 심지어 명종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왕에게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붓기도 했다.
최후
1563년 손자인 순회세자가 죽자 명종은 더욱 실의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그녀는 다시 정사를 주관하게 된다.
1565년 음력 4월 갑자기 병세가 심해져 병석에 눕게 되었다. 5월 5일(음력 4월 6일) 병석에서 유언을 남겼고, 그날 오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였다. 바로 국상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문정왕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불여우 같은 년, 독한 년, 더러운 년"하면서 환호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사후
문정의 시호가 내려지고 위패를 봉안한 전각은 전호(殿號)는 문덕(文德)이라 하였다. 1565년(명종 21년) 윤원형은 실각당했으나 그녀의 친정 동기라 하여 목숨만은 보전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죽자 언관들은 윤원형 일파에 대한 탄핵을 계속하였고 윤원형과 정난정은 강음현에서 자결하게 된다. 죽은 뒤 남편 중종의 능침 옆에 안장되려 하였으나 결국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릉리(현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태릉(泰陵)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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