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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대리청정기의 세도 정치 견제를 시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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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대리청정기의 세도 정치 견제를 시도하다.

 

순조(純祖, 1790년 7월 29일 (음력 6월 18일) ~ 1834년 12월 13일 (음력 11월 13일))는 조선의 제23대 (재위 1800년-1834년)이며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이(李), 는 공(玜), 본관전주(全州), 는 공보(公寶), 는 순재(純齋), 사후 시호는 순종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이다. 이후 철종 때 정원용(鄭元容)의 의견에 따라 묘호가 순종에서 순조로 바뀌었고, 1897년 숙황제(肅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순조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이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선각왕(宣恪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정조(正祖)와 후궁 수빈 박씨(綏嬪 朴氏) 소생의 서차남이다. 1800년부터 1834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800년부터 1803년까지 계적증조할머니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가 섭정을 하였고 1803년부터 이듬해 1804년까지 장인 김조순(金祖淳)이 섭정을 하였으며 1804년부터 1827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827년부터 1830년까지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1830년 아들 효명세자가 훙서(薨逝)하자 다시 친정을 하였고 그 친정 체제는 1834년 승하할 때까지 이르렀다.

 

즉위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朴準源)의 딸 수빈(綏嬪)이다. 비(妃)는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즉위와 함께 영조의 계비(繼妃)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고 1803년 음력 12월까지 계속되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폐위를 주장했던 친오라버니 김귀주(金龜柱, 그는 이미 1786년에 사망하였다)를 비롯한 벽파(僻派)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 수렴청정 기간 동안 벽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므로, 이들은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時派)의 숙청에 주력했다.

이들 벽파는 사학(邪學)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온 터였다.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사교금압(邪敎禁壓))에 관해 하교를 내렸다.(1801년 음력 1월 10일) 그 내용은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니,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것이다. 또한, 오가작통법을 시행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이러한 하교에 따라 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다.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공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公奴婢)를 없애고 서얼허통(庶孼許通)을 시행하는 등(틀림. 서얼허통은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서얼의 허통을 명하였다) 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친정기: 세도 정치와 봉건왕조의 모순 심화

그러나 수렴청정을 맡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마저 국구 김조순(金祖淳) 일파에 의해 실각되어(1803년 음력 12월) 김조순이 1803년부터 1804년까지 1년간 섭정을 맡은 후 비로소 순조는 1804년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여전히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했다. 김이익(金履翼)·김이도(金履度)·김이교(金履喬)·김조순·김문순(金文淳)·김희순(金羲淳)·김명순(金明淳)·김달순(金達淳) 등이 주요인물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세도 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 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이에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양반관료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수탈이나 토호(土豪)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그렇지 않아도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른바 '삼정(三政)의 문란'이 그것이다.

 

대리청정기의 세도 정치 견제 시도

안동김씨 세도 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豊壤趙氏)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 翼宗)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세자는 강단있고 뚝심있는 태도로 분명하게 판단하였고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흔히 세자가 안동김씨를 막으려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안동 김씨의 김이재등은 요직을 맡으며 조씨의 협력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갔다.

 

최후 및 능묘

순조는 재위 34년 만에 45세를 일기로 1834년 12월 13일 (음력 11월 13일) 해시 (오후 9시~11시) 에 경희궁(慶熙宮)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다. 공식적인 승하 원인으로 추정하는 바로는 매독 (일종의 성병) 일 가능성이 높다.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인릉(仁陵)이다. 왕비인 순원왕후와 합장되어 있으며 인근에는 태종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이 위치해 있다. 묘호 순조 의 '순' 은 청렴하며 공정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민란

'삼정(三政)의 문란' 속에서 홍경래(洪景來) 등이 부농(富農)·사상(私商)을 규합하여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1811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홍경래의 난은 무력에 의해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정부는 사회경제적인 근본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양선의 출현

조선은 후기에 와서 일부 이양선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순조실록에 기록된 이양선 출현은 총 3번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영국의 배였다. 이양선이 출현했을 때는 대부분 최대한 빨리 바다로 내보내고, 이들에 대한 기록을 청나라 조정에게 보고하는 것이 조선의 이양선에 대한 기본 대처방안이었다.

순조 16년 (1816년) 7월 19일에 충청 수사 이재홍의 장계가 올라왔는데, 충청 마량진 갈곶 밑에서 영길리국의 이양선이 출몰하였다고 했다. 첨사 조대복과 지방관 비인 현감 이승렬은 이양선에 있던 낯선 사람들과 언문이나 한자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장계에서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들의 배에 들어가보니 내부는 무척 컸고,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배는 무척 빠른 속도로 바다를 빠져나갔습니다." 라고도 했다. 이들이 영국인임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준 한 폭의 서전에서 영길리국이라는 국명이 나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순조 32년 (1832년) 7월 22일(음력 6월 25일)에는 로드 애머스트(The Lord Amherst) 호가 공충도 홍주의 고대도(古代島) 뒷바다에 나타났다. 사실 이 배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보낸 간첩 휴 해밀튼 린제이이 승선해 있었다. 그는 카를 귀츨라프와 함께 광동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청나라 여러 해안의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경제·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 배의 선원들과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는 한자문으로 문답을 나누었다. 이들은 영길리국의 배이며, 청나라와 국력이 대등하여 조공을 바치치도 않는다고 했다. 영길리국의 정보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조선에게 교역을 하고 싶다는 청을 여러번 했으나, 조선 측에서는 이에 대해 강력히 거부하며, 이들이 원하는 물품들을 제공하고 이들을 되돌려 보냈다고 했다.

 

천주교의 수난

신유박해 때의 주문모 신부의 사망으로 조선 천주교회에는 공백이 생겼고, 1805년에 들어서면서 중국 천주교회도 역시, 제사를 금지한 천주교회를 중국의 전통을 파괴하는 무리로 본 중국사회의 저항으로, 천주당(天主堂, 중국에서 천주교 성당을 가리키는 말)과 신학교가 파괴당하는 등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조선 천주교회에 선교사를 보낼 여유가 없어졌다. 이에 조선 천주교회의 공백은 장기화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신유박해 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을해박해)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공백이 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해서 교황 레오 12세(재위 1823~29년)가 조선에서의 전교를 프랑스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하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선교사가 파송될 가능성이 생긴다. 이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바르텔르미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나서자(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재위 1831~46년)는 1831년 9월 9일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를 초대 대목구장 즉, 조선 천주교회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서의 전교를 전담하고 싶어하는 중국 천주교회 유방제(劉方濟) 신부의 욕심 때문에 입국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1835년(헌종 원년)병으로 별세했다.

 

비평

세계사적으로 귀족층이 신흥지주층에게 그 지위를 내주던 때였다. 이미 영국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신흥지주층이 자리를 잡았으며 신흥지주층을 바탕으로 한 서양의 물품이 청과 일본을 통해서 조선으로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서 경제는 몰라도 정치는 글을 배우고 자기수양을 닦은 선비가 해야 한다고 믿었던 조선에서는 신흥지주층의 대두로 인한 귀족층의 몰락을 시대과제로 인식, 선비에 의한 도학정치를 지키려 하였다.

처음에는 정순왕후를 비롯한 영조의 일파가 사대부의 유학질서를 지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안동김씨로 대표되는 신흥지주층이 주류로 정치의 키를 잡았다. 경제를 비롯하여 그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충족시키는 순기능이 있었으나 기존의 유학정치를 포기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후기에는 전기의 안동김씨라는 신흥지주층의 기용을 축소하고 풍양조씨(豊壤趙氏)라는 신흥사대부층을 기용하였으나 이 또한 물밀듯 밀려오는 시대에 대응하는데 실패하여 말기에는 안동김씨의 재기용으로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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