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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전무공, 건륭제 중국 역사상 원나라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제국의 통치자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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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전무공, 건륭제 중국 역사상 원나라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제국의 통치자가 되다.

 

십전무공(十全武功)은 청나라 건륭제가 단행한 10번의 원정을 일컫는 말로, 다음의 원정을 일컫는다.

 

1747년(건륭 12년), 대금천 원정

1755년(건륭 20년), 몽골 원정

1757년(건륭 22년), 몽골 원정

1769년(건륭 33년), 버마 원정

1776년(건륭 41년), 대금천·소금천 원정

1788년(건륭 53년), 타이완 원정

1789년(건륭 54년), 베트남 원정

1791년(건륭 56년), 네팔 원정

1792년(건륭 57년), 네팔 원정

 

보갑제와 이갑제의 덕으로 어느정도 내치를 다져서 그 성과를 본 건륭제는 국고의 은자가 풍족하고 인구도 크게 늘어나 농작도 잘되어 백성들의 호응을 받았다. 나라가 부유해지자 건륭제는 자신의 위엄을 더욱 떨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 이러한 마음에는 건륭제가 평생 존경한 할아버지 강희제에 대한 동경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1747년(건륭 12년), 대금천(大金川)을 시작으로 1755년(건륭 20년), 1757년(건륭 22년) 두번에 걸쳐 강희제 이후 세력이 미미해졌으나 여전히 몽골 고원을 호령하던 중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고 1769년(건륭 33년)에는 버마, 1776년(건륭 41년)에는 대금천과 소금천(小金川), 뒤이어 1788년(건륭 53년) 대만, 1789년(건륭 54년) 베트남, 1791년(건륭 56년), 1792년(건륭 57년) 두 차례에 걸쳐 네팔을 원정함으로써 자신의 권위와 청나라의 국위를 선양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몽골의 군사를 직접 지휘해 격파한 조부와는 달리 전선 근처를 순시하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이때 당시 청나라의 군사 상당수는 개국 때 혁혁한 공을 세운 팔기군이 아닌 강희제 때 신설된 한족 출신의 군대 녹영(綠營)의 군사들로서 남송의 명장 악비의 후손인 사천총독 악종기(岳鍾琪)와 만주족 출신의 장수 아계(阿桂)가 주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중 가장 성과가 있었던 원정은 바로 두 번에 걸친 준가르 원정과 대·소금천 원정이었다. 준가르 원정으로 청나라는 외몽골을 얻었고, 이 기세를 몰아 위구르족을 공격해서 그들을 복속시킴으로써 크나큰 영토를 얻게 되었다. 건륭제는 새로 얻은 영토를 새롭게 번성하라는 뜻의 신강(新疆)으로 명명하였다. 또한 티베트 일대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소 금천 원정에서도 소수의 병력으로 공격하여 성과를 보았으나, 금천의 영토는 몽골에 비하여 턱없이 작았고, 군비도 예상에 비해 너무 많이 지출되었다. 또한 금천 일대에는 1747년(건륭 12년) 금천의 일부 영토를 점령하였음에도 현지 주민들의 반란도 빈번히 일어났다. 주민들은 암도 지구의 티베트인들의 지원을 얻어서 항쟁을 계속하였고, 건륭제는 꼭 29년 후에 유럽의 선교사들이 제작한 최신형 대포로 대금천과 소금천을 초토화시킨 다음에야 강제로 주민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조공품을 얻은 뒤 완전히 통치할 수 있었다. 이로써 건륭제는 청나라의 영토를 약 460만 km² 늘려 중국 역사상 원나라 이후 가장 큰 영토를 가진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버마에서는 콘바웅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으나 청나라와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청군이 쳐들어오자 버마도 역시 군사를 내보내 대응하게 하였으나, 시암의 국왕 딱신이 군사를 내보내 버마와 싸워서 버마군을 대파하였다. 이 덕분에 청나라는 어부지리격으로 버마를 손쉽게 평정하고 버마를 조공국으로 삼았다. 그 후 대만천지회(天地會)라는 종교적 색채를 가진 단체가 반란을 주도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군사를 일으켜 대만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다. 천지회의 일부는 악명 높은 갱 조직인 삼합회(三合會)로 발전한다. 이들은 반청복명을 기치로 거사를 일으켰으나, 건륭제는 빠른 대처로 천지회 반란군은 궤멸시키고 그 지도자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1786년(건륭 51년) 발생한 대만 토호 임상문의 난은 삼합회라고도 부르는 천지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때 건륭제는 만주족 군사가 아니라 한족 군사의 도움을 받는다. 임상문의 난은 만주 팔기가 아니라 채대기, 손사의가 지휘하는 한족 녹영의 군대의 힘을 빌려 2년 만에 진압한다.

대만을 진압하고 그 다음해인 1789년(건륭 54년) 베트남에서는 후 레 왕조 말기에 접어들었으나 떠이선 왕조가 잠시 들어서면서 후 레 왕조를 멸망시켰다. 레 왕조의 마지막 왕인 쯔이에우 통광서성으로 도망쳐 청나라로 망명하여 건륭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건륭제는 그의 요청을 수락하여 대군을 보내 하노이를 공략한 다음 다시 쯔이에우 통을 왕위에 앉혔으나, 그는 이미 건륭제에게 조공을 맹세하고 실권을 청나라에 넘겨 허수아비 왕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떠이선 왕조의 국왕 응우옌훼(阮惠)는 1789년(건륭 54년) 기습적으로 하노이를 공격하여 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놀란 쯔이에우 통은 다시 청나라로 망명하고 응우옌훼는 왕에 즉위한 후 청나라의 승인을 받아 조공국이 되었다.

네팔을 점령할 때는 이미 네팔의 구르카 부족이 쳐들어와 1788년(건륭 53년) 티베트 남부를 점령하고 라사를 향해 진격해오고 있었다. 티베트 주재 청군은 판첸 라마 텐페이 니마를 납치하여 다른 곳에서 요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건륭제는 사천성에 주재하던 군사들에게 티베트 남부에 있는 구르카 군사들을 몰아내라 명령하였으나 이미 구르카 부족은 퇴각한 상태였다. 그러나 1791년(건륭 56년) 겨울, 구르카는 다시 티베트로 진격해 들어왔다. 이에 맞서 건륭제는 팔기군과 녹영의 군사들을 파병하고 그 사령관에 자신의 처조카인 복강안(福康安)을 임명하여 구르카군을 몰아내도록 하였다. 복강안의 군대는 청해성으로 진격해 티베트 분지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날씨가 춥고 고지 분대라서 눈이 녹지 않아 날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봄이 되어 다시 진격한 후 1792년(건륭 57년) 여름에 구르카군을 섬멸하고 그들을 히말라야 산맥카트만두 계곡으로까지 압박하였다. 1793년(건륭 58년) 복강안은 구르카족의 항복을 만주식으로 받고 철군하여 북경으로 돌아갔다.

건륭제는 자신이 이긴 모든 10번의 원정을 십전무공(十全武功)이라 하고 이를 기념해 책을 썼는데 그 책이 《십전무공기》로 청군의 강력한 군사력과 자신의 군사적 지도력을 스스로 칭찬한 저서였다. 또한 자신을 십전노인(十全老人)이라 스스로 칭하였고 자금성 안의 무영전(武英殿)에 청군이 원정에서 얻은 화려한 진상품이나 조공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십전무공으로 건륭제는 청나라의 국위를 선양하고 《십전무공기》(十全武功記)라는 책을 쓸만큼 자부심을 가졌으나 지나친 국고 낭비로 청나라가 쇠퇴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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