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 습격사건, "이것은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바스티유 습격(프랑스어: prise de la Bastille)은 1789년 7월 14일에 프랑스 왕국, 파리의 민중이 동시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 되는 사건이었다.
삼부회의 소집
1789년 5월 5일 미국독립전쟁 지원 등으로 파산 직전의 정부 재정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프랑스 왕실은 그동안 과세가 면제되어온 제1신분과 제2신분에 대한 과세를 결정하기 위해 175년만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신분별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했다. 그러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제3신분(평민)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과세를 피하기 위해 지지부진하게 파행되는 삼부회에 대해 민중은 6월 17일 ‘국민의회’라고 칭하는 집회를 열었고, 이 모임에 제2신분의 합류를 요청했다. 이러한 제3신분의 강경한 태도에 대해 왕의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은 바스티유 궁전의 회의장을 폐쇄하는 단호한 조치를 강구했다. 따라서 회의장에서 배제된 제3신분 대표들은 6월 20일 회의장에 인접한 테니스 코트에서 “헌법 제정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임을 해산하지 않고 계속할 것을” 맹세했다. 이것이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이에 대해 당황한 국왕 정부는 마리 앙투아네 왕비 등 실권을 장악한 보수파를 중심으로 무력을 행사할 자세를 보였지만, 성직자와 귀족 47명이 국민의회에 합류하였다.
결국 루이 16세는 반대파를 무릅쓰고 국민의회를 승인하였고, 성직자, 귀족 모두를 국민의회에 합류한 것을 인정하였다. 7월 9일에는 국민의회는 헌법제정국민의회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헌법 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국왕 정부는 의회 승인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국민의회의 위협 및 치안 악화를 이유로 군대를 베르사유에 소집했다.
네케르의 파면
1789년 7월 11일 이러한 정치적 긴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왕 정부는 2만 병력을 파리에 집결시켜, 그 무력을 바탕으로 민중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던 재무 장관 자크 네케르를 파면했다. 이것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의 독단이었다. 국왕은 파리 민중에 대한 무력 진압에 소극적이었지만 국왕 정부는 강경파들이 차지했고, 루이 16세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습격
“네케르의 파면” 소식에 민중과 부르주아들은 격분했고 7월 12일 수만명의 사람들이 앵발리드(Invalides, 보훈병원)로 몰려가, 자기 방위와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무기와 탄약을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7월 14일, 군중이 앵발리드에서 3만정의 소총을 빼앗고 탄약 조달을 위해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이것은 상퀼로트들의 절대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불만이 절대주의의 상징인 바스티유로 향하게 한 것이다.
그 무렵 이미 시민 대표가 바스티유로 향해 갔으며, 사령관 드 로네이 후작, 역시 무기의 인도를 요구했다. 지휘관은 대표 3명을 불러 식사를 제공하고 예우했지만, 무기 인도는 거부했다. 협상 중에 요새 밖에서 군중의 수가 팽창하고, 흥분 상태가 고조되었다. 11시 반에 앵발리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합류하자, 그 수는 더욱 증가했다. 곧 2명의 남자가 담을 넘어 침입했고, 사령부의 안마당으로 통하는 도개교를 내렸다. 군중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습격이 시작된다. 겁을 먹은 수비병이 발포하면서, 민중과 수비병이 충돌하였다. 혼란의 와중의 격렬한 총격전으로 사상자가 나온다. 시청에서 온 시민 대표가 드 로네이 후작의 중재를 제의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3시 30분이 지나 군중 쪽으로 대포를 쏠 준비를 했다. 패배를 의식한 드 로네이는 보유하고 있는 폭발물로 바스티유를 폭파하라고 명령했지만, 수비대 측의 한 군인에 의해 검거되었다. 요새 내부로 통하는 주요 문인 도개교가 내려지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군중들과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된다. 결국 바스티유 전체를 장악하고, 투옥되어 있던 7명의 죄수를 석방했다. 그리하여,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었다.
쳐들어 갔던 군중들은 사망자 98명, 부상자가 73명이 나왔다. 반면 수비대 측은 패배 후 학살된 사람을 제외하고, 사망자 1명, 부상자 3명이었다.
게다가 이 감옥에는 민중이 생각하고 있었던 정치범도 없었고, 수감된 죄수는 5명으로 그중 3명은 도둑, 나머지 한 사람은 미치광이,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변태 백작”이었다고 한다.
학살
바스티유 사령관 드 로네이는 붙잡혀 시청으로 끌려갔다. 흥분한 군중은 길에서 그에게 린치를 가하려 했지만, 시민 대표가 그에게도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시청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그것에도 한계는 있었다. 시청에 도착하자 군중 속에 몰린 드 로네이는 그레이브 광장에서 살해당해 목을 잘렸다. 3명의 장교와 3명의 수비병도 사령관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또한 시장 자크 드 플레셀도 이날 사건에 대한 대응을 “배신행위”로 비난받아 시청에서 나온 직후 형식적인 인민재판을 받고 살해되어 팔레 루아얄 광장에서 목이 잘렸다. 군중은 그들의 목을 창 앞으로 찔러 높이 들고 시청 앞 팔레 루아얄 광장을 지난다. 이후 7월 22일에도 고위관리였던 푸론이 험한 취급을 받은 후 살해되었고, 또한 같은 고관이었던 베르치에 드 소뷔니도 이날 창 목에 꿰여 돌림을 당하게 된다.
결과
“바스티유 습격” 소식은 즉각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국왕 루이 16세에게 알려졌다. 국왕은 “폭동 인가?”(C'est une révolte?) 물었고, 측근인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 공작은 “아니오 폐하, 이것은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Non sire, ce n'est pas une révolte, c'est une révolution)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국왕 정부를 경악시키고 정책의 변화를 재촉했다. 루이 16세는 군대의 파리 철수와 네케르의 복직을 결정하고 또한 스스로 파리에 가서 새로운 파리 정부 당국과 부르주아의 민병대인 ‘국민 가드’를 승인했다. 이 시정 혁명으로 인해 프랑스 각 도시에서 부르주아로 구성된 상임위원회가 설치되어, 시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루이 16세의 파리행보와 네케르 복직을 제1, 제2 신분 및 왕족들은 민중에 대한 양보로 받아들였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혁명에 대한 무력행사도 불사할 자세를 취하며 국왕에게 압력을 가했다. 무력행사에 소극적이었던 루이 16세는 국민 의회와 국왕 정부 사이에서 진퇴양란에 빠졌고, 또한 마비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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