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 문종(文宗)
능호 : 현릉
조성시기 : 1452년(단종 즉위년) 9월 1일
능의구성
현릉에는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왕과 왕비를 한 능에 묻는 경우에는 다양한 양식이 존재합니다.
현릉의 예처럼,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합니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위의 언덕에 있는 능이 문종의 능이고,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입니다.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놓아 이 능이 동원이강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본이 된 세종대왕의 예전 능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병풍석에서는 이전 왕릉에 있던 방울과 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무늬가 도드라집니다. 고석도 4개로 줄었습니다.
제일 아랫단에는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석인이 있는데
머리와 눈, 코가 매우 크게 표현되었습니다. 문석인도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깊이 새겨진 콧수염이 이국적입니다. 신도비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의논에 의해서 이때부터 건립하지 않았습니다.
능의역사
5대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2년(단종 즉위) 5월에
경복궁 정전에서 승하하였습니다. 건원릉의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습니다.
능지를 정할 때에는 수양대군, 왕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학랑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습니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1441년(세종 23) 단종을 낳고 병이 위독해져 24세의 나이로
문종보다 먼저 승하하였는데,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습니다.
이후 단종의 복위 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그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산줄기 언덕에 천장하였습니다.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동원이강릉을 조성한 후에는 정자각을 두 능의 중간 지점으로 이건하였습니다.
이 때 양릉 사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는데, 능역을 시작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5대 문종(文宗)
생몰년도 : 1414년 ~ 1452년
재위기간 : 1450년 ~ 1452년
생애이야기
조선의 5대 왕인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맏아들입니다.
1421년(세종 3) 8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세종 32)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래 적장승계의 원칙에 따라 등극한 최초의 임금이었습니다.
문종의 나이 29세에 세종이 병들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섭정기간 동안 그는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게 하고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말이 적으며,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또한 문종은 천문과 성리학, 글씨와 시문 등 각 방면에도 통달했습니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1450년에는 『동국병감(東國兵鑑)』이 출간되었고,
그 뒤로 매해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이 편찬되었습니다.
한편 병제(兵制)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사에 배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친세력의 압력 등으로 인해 왕권은 위축되었으며, 문종 자신 역시
몸이 약하여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였고 곧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일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성현의 수필집『용재총화(?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습니다.
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귤을 나무 소반에 담아서 집현전에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집현전의 학사들이 귤을 다 먹자 문종은 즉석에서 시를 짓고 이를 소반 위에 썼습니다.
향나무의 향기는 코에만 향기롭고 /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달구나 /
가장 사랑스런 동정의 귤은 /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구나.
이를 본 집현전 학사들이 그 유려한 글씨와 문장에 감탄하여 이를 다투어 베끼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대궐에서 빨리 소반을 돌려보내라고 성화를 하는 통에 다 베껴 쓰지
못한 집현전 학자들이 소반을 붙들고 차마 놓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