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 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이 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케이초(慶長)의 역(役)’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役)’으로부른다.
전쟁발발의 배경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와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일본의 새로운 형세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 도요토미(豊臣秀吉)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시켰다.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에 있었다. 이에 대마도주는 가신(家臣)인 다치바나(橘康廣) 등의 일행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釜山浦)에 보내어 통호(通好)를 청하였다. 이 소식이 경상우수사의 치보(馳報)로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찬탈시역(簒奪弑逆)한 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접대할 수 없으니 대의(大義)로써 타일러 돌려보내라.”는 뜻을 비치고, 2품 이상의 정신(廷臣)들에게 가부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정신들의 결론은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으나 정의(廷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치바나 일행이 서울에 올라와서 바친 수교문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자 보서(報書)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도 보류하고 있었다.
일본의 통신사 파견 요청
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조헌(趙憲)은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려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지 말 것을 극언하기도 하였다. 그대로 해를 넘긴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588년 문무반 2품직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중추부(中樞府)에 모아놓고 가부를 재론하였다. 그 결과 “바닷길이 어두어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다치바나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宗義智)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었다.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入朝)에 대한 독촉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博多市)의 세이주사(聖住寺) 주지인 겐소(玄蘇)와 가신 야나가와(柳川調信) 및 고니시(小西行長)의 사신인 시마이(島井宗室)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통신사 파견 결정
선조는 구례(舊例)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李德馨)을 선위사로 삼아서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하게 하였다. 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며 함께 일본으로 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서는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 채 소 일행은 일단 돌아갔다.
대마도로 돌아간 그들은 정사에 겐소, 부사에 소를 구성하여 다시 부산포에 왔다. 겐소를 정사로 삼은 것은 국왕사(國王使)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을 다시 맞이한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 사신으로부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兵禍)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던 터라 통신사 파견의 여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정신들의 찬반이 엇갈려 결정을 짓지 못하던 중, 왕의 전교(傳敎)에 따라 조선의 반민(叛民)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끔 왜구(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소요시키니 그들을 잡아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의 명분을 찾고 그들의 성의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는 선뜻 응하여, 야나가와를 자국으로 보내 사화동(沙火同) 등 10여 인을 잡아와서 조선의 처치에 맡긴다 하여 이들을 모두 베어 죽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통신사 파견을 결정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보빙(報聘)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그런데 곧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였다. 즉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의 상반된 보고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국서(國書)를 전하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계포구(堺浦口)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가져오게 되었다.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이었으며, 이때 일본 사신 겐소, 야나가와 등도 따라왔다.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지을 때는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였으며, 사행이 돌아온 뒤에는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또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發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動兵)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貢路)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도 거절하였다.
적의 침입에 대처하는 이순신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請和通好)하는 것이 좋다.”라고 거듭 변장(邊將)에게 말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
그 뒤 왜관(倭館)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金邈)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한편으로는 신립(申砬)을 경기,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 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戰備)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 축성술, 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일본의 병력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고야(名古屋)에서 제군(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웠으며,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각 대를 지휘한 주장(主將)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로 병력 1만 8700명이며,
제2번대는 주장 가토(加藤淸正)로 병력 2만 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로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시마즈(島津義弘)로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로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로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로 병력 3만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로 병력 1만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羽柴秀勝)로 병력 1만 15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상의 병력 15만 8700명은 육군의 정규 병력이었다.
그밖에 구키(九鬼嘉隆)?도토(藤堂高虎) 등이 인솔한 수군(水軍) 9,000명이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고, 구니베(宮部長熙) 등이 이끄는 1만 2000명이 전쟁을 전후하여
바다를 건너 후방 경비에 임하였다.
이밖에도 하야가와(早川長政) 등이 부산에 침입하여 부대의 선척을 관리하는 등
정규 전투 부대 외에도 많은 병력이 출동하여, 전체 병력은 20여 만명이나 되었다.
일본이 침입할 당시에 총병력은 30여 만명으로서,
출정 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약 10만명을 머무르게 하고
3만명으로 경도를 수비하도록 하였다.
전쟁의 발발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송상현(宋象賢)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고니시의 부대는 그 뒤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중로(中路)를 택하여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인동, 선산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순변사 이일이 거느린 조선의 관군을 파하고 조령으로 향하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여
제1번대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 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 영천, 신령, 의흥, 군위, 비안을 거쳐 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빠져 중로군과
합하여 충주로 들어갔다.
같은날 구로다가 인솔한 제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 우도를 따라 올라와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지례, 김산(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모리시마즈가 이끄는 제4번대는 김해에서 제3번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다음
성주, 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후쿠시마 등이 인솔한 제5번대는 제4번대의 뒤를 따라 부산에 상륙하여 북으로 침입하였고,
고바야가와 등이 이끄는 제6번대와 모리 등이 이끄는 제7번대는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다.
우키다의 제8번대는 5월초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서울을 향하여 급히 북상하였다.
그리고 제9번대는 4월 24일 이키도에 유진(留陣)하고 있으면서 침략을 대기하고 있었다.
조선의 뒤늦은 대처
적이 대거 침입했다는 변보(邊報)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난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으로부터 부산진성이 함락된 것 같다는
장계(狀啓)에 이어 그 장계 내용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다음의 인물들을 선발하여 적의 북침에 대비하게 하였다.
즉,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조령, 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하여 죽령,
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 청주, 죽산 방면의 서로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 유극량(劉克良)을 조방장으로 삼아 죽령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으로 삼아 조령을 방수하게 했으며,
전 강계부사 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하여 경주부윤에 임명하여 각자 관군을 뽑아서 임지로 떠나도록 하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백성들은 군인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라 인솔하여 전장으로 떠날 군사가 없었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장수가 군사 모이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이일은 명령을 받은 지 3일 만에 홀로 떠나야 했으며,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뒤에 따라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한, 신립을 도순변사로 삼아 이일의 뒤를 이어 떠나게 하고,
좌의정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로 삼아 제장을 검독(檢督)하게 하였다.
한편, 이일 등이 내려가기에 앞서 경상감사 김수는 왜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열읍(列邑)에 공문을 발하여 각자 소속 군사를 인솔하고 안전한 지역에
모여 주둔하게 하고 경장(京將)이 이르기를 대기하였다.
문경 이하의 수령들 또한 각기 소속 군사를 영솔하고 대구 천변에
나가 순변사를 기다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당도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적세가 점차 가까워오자 군사들이 놀라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비도 많이 내려 우장이 젖은 데다가 군량 보급마저 끊기자 밤중에
모두 흩어져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었다.
수령들은 할수없이 홀로 말을 달려 순변사가 있다는 문경으로 바삐 돌아갔으나
고을은 이미 텅 비어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창곡(倉穀)을 털어서 이끌고 온 잔여 군사를 먹이고 함창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니 목사 김해(金楹)는 산속에 숨어버리고 판관 권길(權吉)만이
읍(邑)을 지키고 있었다.
중로의 방어 책임을 짊어지고 내려간 이일은 상주에 이르러 판관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으며 참수하려 하자, 그가 용서를 빌며 자신이 나가
군병을 불러모으겠다고 자청하였다.
밤새 촌락을 탐색하여 수백명을 불러모았으나,
그들은 군사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농민들이었다.
이일이 상주에 하루를 머무르면서 창고를 열고 관곡을 내서
흩어진 백성들을 모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어 수백명에 이르자
이일은 급히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는 상주에서 모은 사람과 서울에서 내려온 장사 중 800∼900명을 인솔하고
상주 북천변(北川邊)에서 습진(習陣)을 시키면서 산을 의지,
둔진하여 전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제1번대 고니시군의 갑작스런 급습으로 대패하자 관군은 전의를 잃었다.
이일은 단신으로 탈주하여 문경 땅에 이르러서야 상주에서의
패상(敗狀)을 치계(馳啓)하고 물러나서 조령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신립이 충주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신립은 고니시의 부대가 26일에 조령을 넘어 다음날 충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도에서 모은 8,000여의 군사를 이끌고 탄금대(彈琴臺)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일전을 각오하던 중이었다.
왜군의 공격
잠시 후 왜군이 단월역(丹月驛)을 따라 길을 나누어 공격해왔다. 한 부대는 산을 따라 동으로 침입해오고, 다른 부대는 강을 끼고 내려오면서 조총을 쏘아대니 형세가 풍우가 몰아치는 듯하였다. 총성이 진동하여 신립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말을 달려 두어 차례 적진에 돌진했으나 실패하고 전군이 함몰하자 달천강(達川江 : 속칭 달래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그러나 이일만은 동쪽 계곡을 따라 탈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니시의 군사는 가토의 군과 충주에서 잠시 합류했으나 다시 진로를 달리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경기도 여주로 나와 강을 건너 양근을 경유, 동로로 빠지고, 가토의 군은 죽산, 용인으로 빠져 한강 남안에 이르렀다.
또한, 구로다, 모리의 군은 25일에 성주에 이르렀으며, 지례, 김산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 영동으로 나가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기도를 빠져나와 서울로 향하였다.
선조의 피난
일본군이 북상한다는 급보가 계속 전해왔으나 충주 패보를 접하기 이전까지는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중신들의 결의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선조의 피난을 주장하는 일부 조관들도 대의에 억눌려 강력한 주장을 표면화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源)이 각각 안주목사와 황해감사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이 의지하고 따른다 하여, 이원익을 평안도의 도순찰사로 삼고, 최흥원을 황해도의 도순찰사로 임명하여 먼저 가서 백성들을 무유(撫諭)하도록 하였다. 선조가 이렇게 서행(西行)의 채비를 갖추자 대간(臺諫), 종실(宗室)들은 사직(社稷)을 버리지 말 것을 애원했고,
유생들 또한 소를 올려 반대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또한 이 날 대신들은 국세가 날로 다급하니 저군(儲君)을 세워 인심을 계속(繫屬)하기를 청하였다. 선조도 이 청을 받아들여 둘째 아들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했고 백관들은 권정례(權停例)로써 진하(陳賀)하였다. 백관에 명하여 융복(戎服 : 전복)을 입도록 한 것도 이날이었다. 4월 29일 충주 패보가 전해지자, 선조의 서행에 대한 시비를 따질 겨를도 없이 그날 밤으로 이를 결정하였다. 대신들도 “사세(事勢)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평양으로 이어(移御)하시어 명나라의 원병을 청하여 회복을 도모하소서.”라고 아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령 권협(權筵) 등이 청대(請對)하여 도성을 끝까지 지킬 것을
주장하자 유성룡은 “협의 말은 진실로 충성이나, 다만 사세가 부득불 그렇지 못하다.” 하였다. 이어 왕자를 제도(諸道)에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을 불러모아 회복을 도모하게 하고 세자는 어가(御駕)를 따라갈 것을 청하니 왕도 그것에 응하였다. 이에 맏아들 임해군(臨海君)에게 명하여 함경도로 가게 했으며
김귀영(金貴榮), 윤탁연(尹卓然) 등을 따르게 하였다. 셋째 아들 순화군(順和君)을 강원도로 가게 하고 황정욱(黃廷彧)과
그의 아들 혁(赫)을 비롯, 이기(李攪)가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기는 강원도에 이르러 신병을 들어 따라가지 않았다. 순화군 또한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이 강원도에 들어오자 북으로 향하여
임해군과 동행했으며, 김귀영, 황정욱에게 명하여 협동해서 호행하도록 하였다.
국왕 일행이 서행에 오르기에 앞서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하여 도성을 수비하게 하고,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아 한강을 수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병비가 허술하여 대적하기가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밤이 깊어 이일의 장계가 도착했는데 “왜적이 금명간에 반드시 도성에 다다를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장계가 들어오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 왕은 사관(祠官)에게 명하여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의 주판(主版)을 받들고 먼저 가게 하고 왕은 융복으로 고쳐 입고 말을 타고 나섰다.
도성함락
세자 광해군이 왕의 뒤를 따랐고, 왕세자 신성군 후(信城君珝)와 정원군 부(定遠君譜)가 광해군의 뒤를 따라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을 나와 도성을 떠났다. 왕비는 교(轎)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나서자 시녀 수십명이 뒤를 따랐다. 그런데 달이 없는 데다가 비까지 내려 더욱 어두워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왕이 서울을 떠나자 노비들은 그의 문적(文籍 : 노비문서)을 맡고 있던 장례원과 형조를 불질렀다. 이때에 경복, 창덕, 창경의 세 궁궐도 모두 불타 없어졌다.
왕의 일행이 개성까지 도착하는데 3일이 걸렸는데, 출성(出城) 당시 100여 명이던 호종 인원이 그 사이에 상당히 줄어있었다. 그리하여 개성까지 따라온 인원만으로 관원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어 관직의 변동도 많았다. 적군이 서울에 당도한 것은 고니시의 군이 5월 2일, 가토의 군이 3일이었다.
이때 한강을 수비하던 김명원은 적이 쏜 탄환이 지휘본부 제천정(濟川亭 : 현 普光洞 소재)에 떨어지자 한강 수비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임진강으로 퇴각하였다. 따라서 유도대장 이양원도 도성 수비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개성에 머무르고 있던 선조 일행은 도성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를 다시 평양으로 옮겼다. 이어 김명원의 임진강 방어마저 실패하여 개성이 함락되고 적군이 계속 북침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평양 수비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옮겼다. 5월 초에 왜군은 서울을 함락하여 본거로 하고 잠시 쉬었다가 전열을 정비하여 바로 북침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양주 해령(蟹嶺 : 속칭 게너미고개)에서 부원수 신각(申恪) 군의 기습을 받고 패했으나 북침을 중단할만한 큰 타격은 아니었다. 그 뒤 임진강에서 도원수 김명원이 지휘하는 관군이 적의 침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도리어 적의 전술에 말려들어 실패하였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하삼도(下三道)의 대군마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상 도중, 용인, 수원 사이에서 소수의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대패하자
관군에 대한 기대는 절망적이었다. 임진강을 건넌 적군은 3군으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고니시의 군은 평안도 방면으로 침입하여 6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본거로 삼았다. 함경도로 침입한 가토의 군은 함경도감사 유영립(柳永立)을 체포하고 병사 이혼(李渾)은 반민에게 피살되었다. 또한 함경도로 들어간 임해군과 순화군도 반민에 의해 포박되어 적진에 인도되는 등 도 전체가 적중에 들어갔다. 황해도로 들어간 구로다의 군은 해주를 본거로 삼고 대부분의 고을을 침범하여 분탕질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義兵)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하여 무능한 관군을 대신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 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월에 진주목사 김시민(金始敏)은 군관민과 합세하여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