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도 대첩, 조선 수군 일본수군을 학익진으로 크게 무찌르다!
한산도 전투(閑山島 戰鬪) 또는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1592년 8월 14일(선조 25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으로, 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해전에서 펼쳤다.
학익진
배경
1592년(선조 25) 7월 8일(음력 5월 29일)에 2차 출동한 조선 수군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함대는 7월 18일(음력 6월 10일)까지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조선은 일본 육군에 계속 패전하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일본 육군에 호응하여 가덕도와 거제도 부근에서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함대를 이루어 서진하고 있었다.
일본은 해전의 패배를 만회하고 제해권을 재차 장악하고자 병력을 증강하였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1진 70여 척은 웅천(熊川)에서, 구키 요시타카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도 합세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8월 12일(음력 7월 6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더불어 48척을
거느리고 출진하였고,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선 7척이 합세하였다.
8월 13일(음력 7월 7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에 이르렀고, 이곳에 정박하였다.
이때 일본 함대 대·중·소 70여 척이 견내량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였다.
경과
견내량은 거제도와 통영만 사이에 있는 긴 수로로서 길이는 약 4km이며
넓은 곳도 600m를 넘지 않는 좁은 해협이라 전투하기에 매우 좁았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들의 행선에 지장을 줄 것이 분명했던 반면,
한산도는 거제도와 통영 사이에 있어 사방으로 헤엄쳐나갈 길도 없고,
한산도는 당시 무인도나 다름이 없는 섬이었기 때문에 궁지에 몰려
상륙한다 해도 굶어 죽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리하여 먼저 판옥선 5~6척 만으로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한다는 전략이 세워졌다.
왜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
(金千孫)에게 왜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 때 왜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사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屋戰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이 왜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다.
왜수군들은 그 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왔다.
견내량, 한산도, 한산대첩 전투해역
조선 수군의 작전은 성공하였다.
5~6척으로 구성된 적의 소규모 함대를 발견한 일본 수군은 이들을 조선 수군의
모든 함대라고 착각하여 전 함대가 그들을 추격하였다.
일본 함대가 예정대로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대기하던 함대와 함께
전 조선 함대가 뱃길을 돌려 학익진을 펼쳤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육전에서 사용하던 전형적인 포위-섬멸전의 형태다.
전 병력이 사방에서 포위하여 일제히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수군장 와키자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조선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병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일본의 전선들은 판옥선에 비해 급격한 회전이 어려웠고
(따라서 후방은 비워져 있었지만, 쉽게 도망갈 수 없었다),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일본 함대의 정면에 배치된 함대는 많은 피해가 우려되었지만,
조선 함대는 압도적인 화포의 화력으로 이 불리한 점을 극복하였다.
격침되거나 나포된 일본 함선은 모두 총 59척이었고, 병력 4~5000명
(고려선전기 등을 토대로 마치 한산해전에 1500명이 참전했다는 식으로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어떤 일본 사료에도 그러한 말은 없다.
아다케급 함선부터가 7척 참여했는데 1500명이 참전했다는 것은 너무나 큰 무리수이다.)
중 상당수가 전사했으며, 한산도로 도망친 와키사카 휘하의 병력 400여 명
(이순신 장계에는 400명, 협판기에는 200여 명)은 군량이 없어 13일간 해초를 먹으며
무인도에서 떠돌다 뗏목으로 겨우 탈출하였다.
마나베 사마노조는 이때 자신의 배가 소각되자 섬에서 할복(자결)하였다.
이 전투는 행주대첩과 진주성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의 3대 대첩의 하나로 불리며,
이순신은 그 공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억기와 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서(陞敍)되었다.
의의
이 해전을 진주성대첩(晉州城大捷, 1592.10.5.∼10.)·행주대첩(幸州大捷, 1593.2.12.)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부른다.
이 대첩은 왜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
나아가 조선수군이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이미 상륙한 적군에게도
위협을 주어, 그 때까지 매우 불리했던 임진왜란의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외국의 역사가 헐버트(Hulbert,H.G.)도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Salamis) 해전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이 해전과 하루 뒤에 벌어진 안골포(安骨浦 : 진해시 안골동)해전을 승리로 이끈 전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이억기·원균은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의 관계를 받았다.
평가와 견해
결국 이 전투의 패배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함부로 조선수군을 공격하지 말고
육상에서 주로 전투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이는 이순신함대의 활약으로 인해
이제 바다에서는 완전히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이 덕분에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은 완전히 실패했음을 의미한 것으로써
육상의 연전연패로 일본으로 넘어가던 동북아시아 패권은 해상의 연전연승으로
도로 가운데로 세워진 형국이 되었고, 이 해전의 승리로 평양에 웅거하고 있던
일본의 1만 8700명의 고니시 유키나카군은 세력이 고립되어 더 이상 북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발이 꽁꽁 묶였으며 덕분에 전라도와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그리고 멀리 요동까지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