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 동의보감 천하의 보(寶)를 만들다.
허준(許浚, [2013]은 조선 중기의 의관·의학자이다. 동의보감의 저자로 유명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여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관직은 숭록대부 양평군에 이르렀다. 용천부사(龍川府使) 허윤(許碖)의 둘째아들이다.
허준
생애
어린시절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 허곤(許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허윤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그는 일찍이 글을 익혔으며, 다방면의 학문에 통달(通達)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유가(儒家),도가(道家),불가(佛家)를 어우르는 동양의 종합적 사상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허준의 학문적 영역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훗날 동의보감의 집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의관 출사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한성부로 가, 유희춘 부인의 병을 고쳤다.
1569년 이조판서 홍담(洪曇)과 미암 유희춘의 천거로 내의원에 들어가 궁중 의사,
곧 의관으로서 출사했으며, 1570년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한성부 장안에서
고관대작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면서 명성을 높였다.
소설과 드라마에서는 1574년 의과에 급제하였다고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의과 급제자 기록에는 허준의 이름이 없다.
대신 1571년에 종4품 내의원 첨정을 지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최초로 보이며,
1573년에는 정3품 통훈대부 내의원정에 올랐다.
비록 의과에 응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동료 의관들보다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578년 9월 허준은 내의원 첨정으로 있을 때 당시에 새로 출판된
'신간보주동인유혈침구도경' (新刊補註銅人腧穴鍼灸圖經)을 임금으로부터
선물로 하사받았다.
1587년에는 갑자기 심신이 허약해진 선조임금의 건강이 회복되어 수고로 내의원
책임자와 어의들이 모두 포상을 받았다.
이때 허준은 태의 양예수(楊禮壽)·안덕수(安德秀) 등과 함께 사슴가죽 1장을
선물로 하사받았다.
이후 구안와사에 걸려 입이 돌아간 공빈 김씨의 남동생을 진료하여 완쾌시켰고,
1590년 허준이 왕자 신군(인빈 김씨의 아들)을 살린 공으로
당상관(정3품 통정대부 이상을 말함)으로 승진했다.
허준이 당상관에 가자되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와 의금부에서 일제히 나서서
탄핵, "왕자를 치료한 것은 의관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고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의관에게 당상의 가자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므로 취소할 것"을 왕에게
여러 번 간청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살상되고 왕은 의주까지
피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허준은 선조의 건강을 돌보았다. 선조를 호종하여 그의 건강을 돌본 공로로
허준은 뒷날 공신의 대열에 끼게 된다.
1596년 왕세자 광해군의 병을 맡게되어 이를 고친 공로로 허준은 정2품으로 가자되고
김응탁(金應鐸)·정예남(鄭禮男)은 승급되었다.
이어 허준은 정헌대부 중추부지사에 올랐다. 그가 정헌대부에 오르자 즉시
삼사의 간원들이 나서서 탄핵, 의관들의 가자를 취소할 것을 청했으나
선조가 "공로가 있는 자들이다"라고 하여 듣지 않았다.
1595년 왕이 별전편방에 나와 침치료를 시술하였다. 이때 약방 도제조 김응남,
제조 홍진, 부제조 오억령 등이 참여하였다.
1597년 이후 허준은 유의 정작(鄭碏)과 태의 양예수·김응택·이명원(李明源)·정예남 등과
편국을 설치하고 의서를 편찬, 요점을 잡아가는 시점에 98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져 작업은 자연히 중지되었다.
이에 선조가 허준을 다시 불러 허준 혼자 책임지고 새로운 의서를 만들라고
하면서 내장방서 500권을 내어주며 참고하도록 조치했다.
1600년 정2품 중추부지사를 겸직하던 수의(내의원의 책임자) 양예수가 병사함에
따라 허준이 내의원 최선임자로 수의가 되었다.
1604년 호성공신 3등에 오르게 되고, 이때 의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정1품 양평부원군에
올랐으나,대간들의 반대로 인해 종1품 양평군(陽平君)으로 강격되었다.
군(君)은 왕의 서자나 당상(堂上)의 위계에게 주어지는 부군(府君)의 관작을 말한다.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가 1606년 이어 왕실의 병을 다스린 공로로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가자되었으나, 보국숭록대부는 당상관의 문관이 받는
위계라는 이유로 또 한 번 대간들의 반대를 불러 백지화되었다.
1607년에는 임금의 병이 위중하고 잘 낫지 않았는데 이것은 허준이 약을 잘못 썼기
때문이라 하여 연일 조정에서 수의 허준을 벌주어야 된다는 여론이 강했으나 선조가
벌을 주기보다 의술을 다하게 해야 한다며 무마시켰다.
유배와 말년
1608년 음력 2월 선조가 병세가 급박하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종래의 예에
따라 조정 신하들의 갖가지 책임 추궁을 당한 끝에 결국 파직당하고 의주로
문외출송되었다.
문외출송(門外黜送)이란 유배의 일종으로, 죄를 지은 사람을 한성부의 사대문 밖,
곧 지방으로 추방하는 형벌이었다.
광해군은 허준을 빠른 시일내에 복귀시키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허준은 이런 와중에 1596년부터 왕명으로 편찬하고 있던 1610년(광해군 2년)
당시의 모든 의학 지식을 망라한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을 15년여의 연구
끝에 편술을 완료하였다.
《동의보감》은 조선 한방 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8세기에는 일본과 청나라에서도 간행될 만큼 높이 평가되었으며,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고 있다.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친 이후 그 해 음력 11월 22일(양력 1611년 1월 5일) 귀양이
풀리고 신원되어 내의원에 복직하였다. 그 뒤 허준은 후진 양성과 의서 편찬 및 의서 수리
등을 맡다가, 1615년 음력 8월 17일(양력 10월 9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537년생설을 따르면 향년은 79세가 된다.) 다음달에 광해군은 허준의 관작을
그의 생전에 보류되었던, 숭록대부보다 더 높은 관작인 정 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양평부원군으로 추증하였다.
사후
그의 고향인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의 민간인통제구역(DMZ) 안에 허준과
부인 안동 김씨 그리고 생모의 묘소가 위치해 있다.
이 묘소는 한국전쟁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1991년 군사 협조 아래 역사학자 이양재 교수와
종친회, 그리고 허준선생기념사업회의 조사활동으로 다시 발견되어 현재는 완전히
재정비되어있다.
2006년 5월 군사안보 관광 구역으로 공개되었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공원인 구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오해
TV 드라마에 허준이 유의태라는 인물로부터 의술을 배웠다고 알려졌지만,
유의태란 이름의 의원은 허준보다 100년 이상 늦은 시기에 활동했을 뿐이며 허준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드라마엔 허준이 평안도 용천에서 태어나 경남 산음(산청) 자란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론 경기도 양천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각종 기록에 '양천인(陽川人)'이라고 적혀 있으며 선조로부터 양평군(陽平君)이란
품계를 받은 것을 근거로 들었다.
논란
출생시기 논란
오늘날 허준의 출생 연도를 1539년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1991년까지는
양천허씨종친회의 족보에 기재된 1546년 출생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같은 해 이양재가 허준의 묘소를 발견한 이후부터
차츰 허준의 출생 연도에 관한 여러 학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대 관찬 서적을 제외한 여러 서적에서 1546년(명종 2년), 1547년(명종 3년) 등으로
출생 연도에 대한 기록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가장 처음 허준의 출생 연도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이양재 교수로, 이후
이양재를 위시한 사학자들이 1999년에 조선 중기의 의례 서적 중 하나인
《태평회맹도》에 그의 출생 연도가 기해년(己亥年), 즉 1539년(중종 34년)생이라는
기록이 발견되고, 같은 시대를 살았던 문장가 최립(崔笠)의 문집(文集)
《간이집(簡易集)》에서, 최립이 자신의 친구 허준이 의주로 귀양가게 되던
1608년경의 일을 기록하면서, 허준이 자신과 동갑내기인 1539년생이라는 것을 언급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 기록은 하나의 시문으로 실려 있었는데, 그 제목은 “내 동갑내기 친구 태의
양평군 허준이 의주에서 조정으로 돌아오는 데에 부쳐”라는 의미의
《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自義州(증송동경 대의 허양평군 환조자의주)》이다.
또한 서울특별시 강서구에 위치한 허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내의원 명부인
《내의선생안(內醫先生案)》에는 허준의 출생연도가 1537년 정유년(丁酉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허준박물관의 김쾌정 관장은 당시 내의원의 기록이 태평회맹도의 기록보다 더 정확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내의선생안》은 1605년에 저술된 명부로 허준이 직접 서문을 달았으며, 허준의 선계
(아버지 론, 조부 곤, 증조부 지) 직계가 실려있다.
또한 허준의 향년(享年)이 77세라고 기록하고 있다. 《태의원선생안》에서도 역시 허준의
출생연도를 1537년 정유년으로 밝히고 있다. 하지만 허준이 1537년생이라면 1615년에 숨을
거둘 당시 그의 나이는 79세여야 하므로 이는 《내의선생안》의 기록과는 다르다.
허준 서출 논란
양천허씨족보에서는 허준을 서자로 기록해 놓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준의 생모가 허윤의 첩인 일직 손씨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허준의 생모는 사실 허윤의 재취부인 영광 김씨이다.
허준을 내의원에 천거한 미암 유희춘의 일기 《미암일기》에 따르면 김시흡이라는
인물을 거론하며 허준의 외삼촌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서 서간학자
이양재는 김시흡의 기술을 “적(嫡) 외삼촌”이라고 기록한 것에 의거하여,
허윤의 재취부인 영광 김씨도 서녀로서, 허준은 서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적(嫡)이라는 표현은 허준의 생모인 영광 김씨에게
동복남매의 남자 형제 말고도 서자 남자형제가 있었다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허준이 서자였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는 없다.
또한, 허준의 동복동생으로 알려진 허징은 1586년에 문과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그 이름과 부모관계가 당시의 기록인 국조방목에 남아 있다.
서자는 문과, 즉 대과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부분이야말로 허준의 생모 영광
김씨가 적실 소생이며, 허준과 허징 형제 역시 서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허준이 1573년에 이미 정3품 내의원정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1575년에
선조의 어의로 임명되었으므로, 허징이 과거를 치렀던 1586년 시점에는
이미 그 어머니와 허준의 동복동생인 허징 또한 중인
출신이 아닌 반가의 혈족으로 인정받았을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허준이
실제로 당상관 반열에 오른 것은 1590년경의 일로 허징이 과거에 급제한 1586년보다
4년 뒤의 일이기 때문에 이 대목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허준의 후손 논란
허준에게는 외아들 허겸(許謙)이 있었다. 허겸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거쳐 이후
파릉군(巴陵君)에 봉작받았다. 이후 19대 숙종 때에는 그의 증손자 허진(許瑱)이
파춘군(巴春君)의 작호를 받았으며, 허진의 아들이자 허준의 고손자인 허육(許堉)은
양흥군(陽興君)의 작호를 받았다.
허육의 아들이자 허준의 5대손인 허선(許銑)은 21대 영조때에 양원군(陽原君)에
올랐으며, 허선의 아들로 허준의 6대손인 허흡(許潝) 역시 영조 때 양은군(陽恩君)에
봉작받았다.
이렇게 누대에 걸쳐 후손들이 조정의 관직을 역임했으며, 선대가 살던 경기도
장단군 우근리(현재 경기도 파주시)에 대대로 거주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허준의 10대손 허도(許堵 / 1827~1884)가 황해도 해주로 이주했으며,
13대 종손 허형욱(許亨旭 / 1924년생)이 1945년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이후 그의 직계 종손은 현재까지 북한에서 살고 있으며, 현재 남한의 양천 허씨 중 허준의
후손을 자칭하는 사람들은 사실 허준의 진짜 후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양천허씨종친회에서
직접 밝히기도 했다.
평가
허준이 주치의로서 모셨던 선조는 그를 가리켜 "제서(諸書)에 널리 통달하여
약을 쓰는 데에 노련하다." 라고 평가한 바 있으며, 조선 중기의 학자 이수광은
"허준이 저미고란 약으로 많은 사람들의 두창을 고쳤으며, 근래에 양예수, 허준,
박제가, 손사명, 안덕수 등이 의원으로 이름이 있을 뿐이다" 라고 평가했다.
일본에서는 그를 가리켜 “한국행림(韓國杏林) 편창(扁倉)”, 즉 한국에 나타난
편창이라 칭하였고, 중국에서는 “천하(天下)의 보(寶)를 만든 사람”이라며 칭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