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하다.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며,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정약용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1762년 음력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난 후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제권에게서 학업하였다.
정제권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니 약용은 넷째 아들이다.
일곱 살 때에 '산'이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는데,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내었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해 맏형수 경주 이씨와 서모 김씨의 손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들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1776년에 승지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혼인하여 6남 3녀를 낳았으나 생전에 4남 2녀를 잃었다.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이벽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1629~1690)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성호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 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생애
성장과 공직 생활
결혼하던 해에 부친이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살게 되었다.
15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19세 때는 예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1783년에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로 생원이 되었다.
같은해 음력 9월 장남 학연이 태어났다. 22세에는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3세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25세 때 차남 학유가 태어남.
1789년(정조 13년),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승정원의 가주서, 예문관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시 해미면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
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31세이던 1792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고 이듬해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교우 강완숙등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전교를 하다가
적발된 주문모 사건에 휘말려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
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는데,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던 것이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천주교 박해 연루
1800년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는 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자, “사교(邪敎)는 자기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라는 그러니까 성리학이 바르게 교훈된다면
성리학에 반하는 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윤지충과 권상연이 천주교 예식으로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관련자들을 처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가 성리학 전통을 부정할 경우에는 탄압하였다.
임금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천주교회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신유박해라고 부른다.
신유박해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노론의 정치적 공격으로, 이가환·
권철신·이승훈·최필공(崔必恭)·홍교만(洪敎萬)·홍낙민(洪樂敏)·최창현(崔昌顯) 등이
연루되었으며, 이 박해에 정약용과 그의 두 형인 정약전(둘째 형), 정약종(셋째 형)도 연루되었다.
정약용과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정약종만 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과 정약용은 천주교에
무관심한 비신자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
그리하여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은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참수를 당해 죽었다.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이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말년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음력 2월 22일에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티라"는 것이었다.
평가
정약용은 유형원·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실학사상을 한 몸으로 집대성했다.
한국 근세에서 남인학파의 불평의 비판과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다산은 남인학파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고, 자기의 학문·사상의
체계화를 정리한 귀양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보내기까지의 중앙 관리의 경력,
지방행정의 경험, 연천(連川) 방면의 암행어사 행각, 청년 시절의 왕환(往還)과 부친의
임소(任所)에 수행한 견문, 그리고 귀양살이 등은 그대로 생생한 교훈이며, 평생을
통하는 힘이었다.
이와 같은 견문과 경력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은 모두 ‘다산학’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이 아님이 없다.
이러한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사회에 적절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다산이야말로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학풍을 한 몸으로 총괄·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인 것이다. 일찍이 위당 정인보는
“ |
선생(茶山) 1인에 대한 요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
” |
라고까지 평하여 그의 학문·저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최근에 와서 다산 연구의 열의가 높아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른바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주요 저서로 꼽힌다.
《목민심서》 :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牧民官, 수령)의 치민(治民)에 관한 요령과 감계(鑑戒)가
될 만한 마음가짐과 태도 등을 저술한 책 이다.
《흠흠신서》 : 곡산부사로 재직할 때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서술한판결과 형벌 및
치옥(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에 관한 책으로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가벼이 처리하지 않도록
유의할 점을 적었다.
《경세유표》 : 관제·군현제와 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거제·해세(海稅)·상세(商稅)·
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책이다.
노론의 적개심
생전 500여권 이상의 저작들을 출간하였다. 저작들의 대부분은 유배생활 19년간 집필한 것이다.
20세기 초반 까지도 노론계 인사들은 남인에 속하는 정약용을 혐오하였다. 한국에 서점의 개념이
도입된 1890년대 이후, 자유롭게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음에도 그의 저술들을 외면하였고,
윤치호는 노론계 인사들은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어젯밤 추도식을 지낸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이다. ...(이하 중략)...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상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윤치호일기, 1935년 7월 17일자
노론은 정약용이 죽은지 130년이 지난 뒤에도 정약용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였다.
홍국영, 혜경궁과의 관계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가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에게는 할아버지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