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들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사건, 암호명 '여우사냥'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
(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때의 암호명은 '여우사냥'이었다.
그동안 일본은 조선의 분쟁으로 일어난 일본 낭인들이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했지만,
2005년 일본 영사 우치다 사다쓰지가 을미사변 사건 두 달 뒤에 작성한 일본 천황이 결재한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준비과정
을미사변은 미우라 일파가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진정한 주동자는
미우라에 앞서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비롯한 일본 정치의 최고 원로
(元老 : 겐로) 및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한 각료였다.
당시 을미사변 실행자들이 일본 정부의 실권자인 원로들에게 보호 받았는지는 그들의
사후 출세 가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심지어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석방되자 일본 메이지 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하기까지
했다.한편 사건의 실행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목격자인 궁녀, 환관, 태자 이척
등이 증언한다.
또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 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Sabatin, 흔히 사바틴)과
시위대 교관인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이 현장을 목격하였고,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서양 각국에 알려졌다.
일본은 기록을 조작하여 황후 살해 책임을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에게 돌리려 했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준비
을미사변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당근과 채찍을 준비하였다.
당근으로는 왕실을 회유 혹은 매수하여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경계심을 풀게 하려
했으며, 채찍은 바로 황후 시해였다.
《한국통사》 등에 따르면,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부부는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일본을 다녀온 뒤 왕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9천 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바쳤다고 한다.
당시 내각에서 논의하고 있던 조선 정부에 대한 차관을 지급하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거짓말까지 한다. 고종은 이노우에가 너무 진지하여 예방을 소홀히 했다고 한다.
이때의 이노우에의 행동은 일본에 대한 고종과 황후의 경계심을 풀게 하려는 계산된
연극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매천야록》과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일본은 고무라(小村室)의 딸을 명성황후의
양녀로 삼게 하였는데, 뒤에 그녀는 명성황후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또한 고무라의 딸과 명성황후가 궁중 연희(演戱)를 보고 있을 때 배우 가운데 종왜
(從倭, 일본을 따르는 사람)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가 1895년 9월 1일(음력 7월 15일) 공사로 부임한다.
전문 외교관이 아닌 군인 출신을 공사로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특수 임무를 띠고 있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이 있다. 우익 군인 세력의 거두였던 미우라는 조선에 온 뒤 두문불출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냈는데,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염불 공사’였고, ‘수도승 같다’라는 평을
들었는데, 이는 경계심을 풀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시해 계획과 준비
황후 시해 계획을 세운 이노우에가 일본으로 돌아간 때는 사건 20일 전이었다.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세부 계획이 세워진 때는 10월 3일(음력 8월 15일)이었고, 장소는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이었다.
그때 미우라의 참모는 시바 시로(柴四郎)였는데, 하버드 대학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고급 지식인이었다.
그는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의 극우 낭인 단체인 천우협(天佑俠)과 현양사(玄洋社) 소속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미우라를 보좌하였다.
일본의 낭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특이하게도 고급
지식인 출신이 많았고, 심지어 동경제국대학 출신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직업적 정치깡패가 아니라 고도로 의식화된 지식인 테러리스트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날 모의에 참여한 사람은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 濬)와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으로서 평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운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 柳之助) 대위,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萬一), 그리고 공사관 무관이자 포병 중좌인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 幸彦)였다.
그밖에 직원에게는 비밀 유지를 위해 일체 알리지 않았다.
우치다 사다쓰치(内田 定侈搥) 일등영사도 이 모의에서 빠졌다.
당시 논의한 내용은, 첫째 시해의 주역은 일본 낭인이 맡고, 외관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이 일은 청일전쟁 직후 갑오경장 때 일본 군인의 궁궐 점령을 지휘한 오카모토에게
맡겨졌다.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로 구성한다.
이때 낭인 자객은 한양에서 발행하는 일본인 신문인(新聞人),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가 맡았다. 규슈와 구마모토 현 출신 낭인 30여 명과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사사키 마사유키, 기쿠치 겐조 등의
민간인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민간인의 참여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더라도 공사관이나 일본 정부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비중이 컸다.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그래서 황후 시해에 구스노세 유키히코 등이 참여한다.
넷째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한다.
미우라는 황후 시해를 위한 음모를 “여우사냥”이라고 불렀으며, 예상보다 일찍 훈련대가
해산되자 거사 일시를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기게 된다.
그러나 바뀐 계획도 차질이 생긴다. 새벽 4시에 작전을 끝내려면 늦어도 새벽 3시까지는
흥선대원군과 흉도들이 경복궁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을 떠난 때는 새벽 3시였고, 경복궁에 도착한 때는 새벽 5시가
넘어서였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된 때는 6시경이었다. 그래서 많은 목격자가 나타나게 된다.
1894년 4월 15일 고등재판소 판사 권재현이 법부에 제출한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입궐하던 날 간사한 무리를 몰아낸다는 요지의 유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매천야록》에서는 이 유시가 김홍집 등이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한국통사》에서는 대원군이 입궐하는 일본인들에게“오늘의 일은 단지 왕실을
호위하는 것뿐이다. 궁중에서 폭거를 행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흥선대원군이 황후 시해에 동의했는지 매우 의문이다.
한편 일본으로서도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는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서기관
스기무라가 4개조 약조문을 초안하고, 10월 6일(음력 8월 18일) 오카모토가 이를 가지고
공덕리에 가서 대원군의 서약을 받았다.
주된 내용은 대원군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전모임
조선 정부가 훈련대의 해산을 명령한 때는 10월 7일 새벽 2시였다. 이에 군부 대신 안경수가
9시경 급히 이 사실을 미우라에게 통보하고, 뒤이어 우범선도 달려와 미우라에게 보고했다.
이에 미우라는 거사 날짜를 그날 밤으로 바꾸고 스기무라와 의논한 뒤 오카모토를 불러들인다.
오카모토는 10월 6일 대원군을 만난 뒤 일본으로 가는 척하다가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미우라는 거사 계획서인 〈입궐방략서〉(入闕方略書)를 영사관보인 호리쿠치 구마이치에게
주고, 용산으로 가서 거사 준비를 지시한다.
이에 한성신보 직원들과 낭인들은 칼 또는 총을 들고 용산으로 모였다.
또 미우라는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 秀次郎)에게 영사관 순사들을 인솔하여 사복에 칼을
차고 용산으로 가도록 지시한다.
아사야마로 하여금 군부 협판 이주회에게 사실을 알리도록 하였고, 이주회가 조선인 몇 명을
규합하여 공덕리로 가도록 했다. 그렇게 그날 밤에 공덕리 대원군 별장에 모인 사람은
공사관 직원, 고문관, 순사, 기자 등 약 6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술에 취한 상태였고 복장도
제멋대로였다.
일본인들이 공덕리에 도착한 때는 자정쯤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교여를 타고 떠난 때는
새벽 3시경이었다. 대원군은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담을 넘어 가서 별장 경리(警吏)를 모두 포박하여 가두고 옷을 빼앗아 일본인
순사들이 입었는데, 조선인으로 위장하려 함이었다.
오랜 실랑이 끝에 대원군이 집을 나섰는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대원군을 반강제로
끌어냈으리라 여겨지며, 76세 노령의 대원군이 이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일행이 서대문께에 이르렀을 때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 제2대대와 합류했다.
그들은 그때까지는 황후를 시해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잠시 뒤에 장소를 잘못 알아 엉뚱한
곳으로 갔던 140여 명의 일본 수비대 제1중대가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때 경복궁에서는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광화문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수비대 제2중대장은 훈련대 제2대대를 인솔하고 춘생문(경복궁 동북문)
부근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새벽 2시경부터 미리 와서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다가 광화문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사방에서 궁궐 담을 넘어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乾淸宮) 쪽으로 돌진했다.
새벽 2시경에 별군관에게 고종의 호위경관 2명이 달려와 삼군부(광화문 앞 경비실)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운집해 있다고 보고하자, 현흥택 정령은 즉시 궁궐 경비병 여럿을
광화문으로 급히 보내 상황을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 새벽 4시 무렵에 조선군 훈련대 대대가 춘생문(春生門, 경복궁 동북문)과 추성문
(秋成門, 경복궁 서북문)을 포위하였다고 현흥택 정령은 증언했다.
다이 장군과 사바틴은 이학균 부령으로부터 보고받자마자 일어나 별군관실로 갔으나 2명의
부령과 최소한 6~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하고 있어야 함에도 그곳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고 사바틴은 증언했다.
건청궁 옥호루
또한 고종은 이미 새벽 4시 반 전후로 궁궐이 소란함을 알고 있었으며, 명성황후는 위험한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를 떠나 은신하였으리라 여겨지나 궁궐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리라 본다.
고종은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를 받고 이범진에게 시간을 다투어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범진은 일본인 순찰을 피해 높이가 4~5미터인 담에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하였다.
미국 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대궐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고 이범진은 증언했다.
이범진은 미국공사관을 거쳐서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음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한편 고종이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연락하라고 한 까닭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이
궁궐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례로 시위대 지휘관은 퇴역 미군 대령 출신의 다이(W.M. Dye)였고, 미국 공사관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앨런은 최초의 외국인 어의였다.
또한 미국과 러시아 외교관이 일본은 유럽을 두려워한다고 건의하자 채용한 유럽인
경비원 가운데 건축기사 사바틴이 있었다.
사바틴의 증언을 보면 사건 전날(10월 6일) 밤에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군이 대궐 앞에
모여 소란을 피웠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는 당일 밤에는 음모가 있으리라는 정보도
중국인으로부터 사전에 입수했다.
그런데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결국 대궐이 포위되는 지경에 이른다.
경복궁 진입
새벽 4시 30분경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인솔을 받으며 뭔가 상의하였다.
그 뒤 한 조선인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어 달라고 몇 번 외쳤다.
새벽 5시 무렵 흥선대원군 일행이 광화문 앞에 이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미리 준비한 긴 사다리를 건네고, 일본 순사들이 담을 넘어 빗장을 풀었다.
광화문을 지키던 경비병과 순검들이 저항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
일본인들을 막으려고 나왔던 홍계훈은, 일본인에게 호통을 치다가 일본 수비대가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또한 담을 넘은 일본인 폭도들이 궁궐 경비병에게 발포하자,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던져 버리고 초소를 떠나 어디론가 달아나기도 했다.
한편 폭도들은 남쪽의 광화문, 동북쪽의 춘생문, 서북쪽의 추성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하였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이 소리를 지르며 북쪽의 건청궁을 향해 돌진했다.
3백~4백여 시위대가 연대장 현흥택(玄興澤)과 교관 다이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총격전을
벌였으나,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건청궁까지 다가온 흉도들은 대오를 맞구어 합문(閤門)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다.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흥선대원군은 근정전 뒤 강녕전
(康寧殿) 옆에서 기다렸다.
훈련대 군인들은 건청군 앞마당에서 쉬며 황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또한 사바틴은 궁궐 안에서 수비하던 도중 폭도와 환관(宦官), 벼슬아치, 궁노(宮奴) 등에게
떠밀렸다가 일본인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원래 직업인 건축가임을
밝히고 호위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 뒤 그곳에서 서서 사건을 목격하다가 명성황후 시해에 앞서 두들겨 맞고 현장에서
쫓겨난다.
명성황후 시해
궁 안의 상황과 흉도들의 궁 안에서의 행동은 자료와 증언마다 차이가 있다.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이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궁전 뜰에서 일본인의 행패를
목격했다.
시위대 교관이던 미국인 다이(Dye)도 시위대를 지휘하면서 궁 안에서 이 참상을 목격했다.
사바틴과 다이는 둘 다 일본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뒷날 일본인들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는 증언을 하였다.
명성황후
흉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등 난폭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두들겨 맞고 내던져짐에도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건청궁 동쪽 곤녕합에서 황후를 찾아냈는데,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두 팔을 벌려 황후 앞
(또는 황후가 있는 방문 앞)을 가로막고 나서다가 권총을 맞고 쓰러졌으며, 이어 신문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가 다시 칼로 두 팔을 베었다.
흉도들은 궁녀들 사이에 숨었다가 도망치는 명성황후를 쫓아가 그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려
내동댕이친 뒤 구둣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렀다.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 군인들은 황후를 죽이기에 앞서 능욕했다는 주장이 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를 하였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
- 이시즈카 에조, <에조 보고서>
명성황후가 절명한 시각은 사바틴이 현장을 떠난 지 20~30분 뒤인 새벽 5시50분 이후인
10월 8일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로 여겨지나, 절명한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여간 방 안에서 황후의 시신을 보았다는 증언은 많다. 또한 흉도들은 황후를 죽인 뒤에도
그들이 죽인 사람이 황후임을 알지 못하여 용모가 비슷한 궁녀를 세 명 살해하였다.
흉도 가운데 황후를 죽인 사람으로 자주 지목되는 사람은 데라자키 다이키치(寺崎泰吉)이다.
그밖에도 나카무라 다테오(中村楯雄), 후지카스,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등의 낭인과
미야모토 소위, 마키 등의 일본 군인들이 황후의 침실에 난입하여 칼을 휘둘렀기 때문에
누가 범인인지 지목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흉도들은 그들이 살해한 네 여인 가운데 누가 황후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는,
궁녀와 태자를 불러와서 확인했다는 설, 황후 얼굴을 잘 아는 고무라의 딸을 불러와서
확인했다는 설(《매천야록》), 황후의 얼굴에 있는 마마 자국을 확인했다는 설, 처음부터
초상화를 들고 들어왔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여러 방법을 섞어서 썼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미우라 공사는 새벽에 고종을 면담하기 위해 궁에 들어간 뒤 황후의 시체를 직접 확인하고
나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오기하라에게 급히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흉도들은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순속으로 가져간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유골을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이 우연히 발견하여 연못 향원정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뒷날 친일 내각은 윤석우를 비롯한 군부 협판 이주회, 일본어 통역관 박선(朴銑) 등을 무고하게
반역죄 또는 불경죄로 사형에 처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관에 넣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궁내관 정만조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법부 협판 권재형의 보고서(흔히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따돌려
명성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 문앞에 나와 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또한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당시 흉도들은 남의 나라 국모를 무참하게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일본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 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일본제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전문(電文) 한 장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여론 호도 작업
을미사변이 일어난 10월 8일 아침에 고종이 미우라 공사에게 사자를 급히 보내 어젯밤 일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는 서기관 스기무라와 통역관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왔다.
고종은 아침 8시경 건청궁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우라와 스기무라, 그리고 자객의
우두머리가 옆에 섰으며, 흥선대원군도 들어와 고종 옆에 앉았다.
미국과 러시아의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왔다.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김홍집 등이 연락을 받고 궁으로 들어올 때 미우라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황후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고 화장을 명한다.
《한국통사》에는 미우라가 고종을 알현한 곳이 건청궁으로 되어 있다.
김홍집 내각은 세 가지 조칙을 기초하여 고종에게 서압(서명)하라고 요청했다. 고종이
거부하자 그들은 서로 서압하고 물러났으며, 일본 군인들도 궁궐에서 철수하였다.
이날 군부 대신은 안경수에서본의 사주를 받은 조희연으로 바뀌었고, 권형진이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사, 유길준이 서리내무 대신, 어윤중이 탁지부 대신, 장박(張博)이 법부 대신,
서광범이 학부 대신, 정병하가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황후 시해를 방조
또는 묵인한 이들이다.
사건 직후 미우라는 황후 시해 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호도하는 공작을 폈다. 미우라는
이튿날인 10월 9일과 그 다음날인 10월 10일 외부에 공문을 보내었다.
그 와중에 군부 대신 조희연이 일본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미우라는 조선 외부(外部)와
군부(軍部)의 입을 통해 일본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짓 증명을 받아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0월 9일에는 사바틴의 입을 막기 위해 친일 내각이 그에게 내무부
고문직을 제의했으나, 사바틴은 거절했다.
폐서인 조칙
한편 을미사변 직후 고종은 허수아비처럼 되었다. ‘대군주폐하’라는 존칭을 받고, 황제가
쓸 수 있는 ‘조칙’을 내리고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내린 조칙이 없었다.
10월 10일(음력 8월 22일) 김홍집 내각은 ‘황후’를 서인(庶人)으로 폐위하는 조서(詔書)를
김홍집 내각이 스스로 서압하여 고종의 명의로 발표했다.
그 가짜 조서에서 “옛날 임오 때와 마찬가지로 짐을 떠나 피난했다.”라는 거짓말을 하였다.
이때 서명한 이는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조희연, 서광범, 정병하 등이며, 탁지부 대신
심상훈(沈相薰)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때 “나라의 원수를 갚지 않으면 벼슬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으며, 그런 까닭에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왕태자가 가장 먼저 명성황후의 폐위에 반발하면서 태자위를 양위(讓位)하겠다며 저항하자
다음날인 10월 11일(음력 8월 23일) ‘황후’를 ‘서인’에서 후궁에 해당하는 ‘빈’(嬪)으로
승격시켰다.
10월 14일(음력 8월 26일)에는 황후를 새로 간택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고종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었고, 고종은 그 뒤로 1919년 죽을 때까지 황후를 새로 맞이하지 않았다.
명성황후 시해와 폐위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민심은 극도로 나빠졌으며, 재야에서는
황후의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복수를 외치는 의병운동(을미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폐위 소식을 들은 외국 공사들은 고종이 직접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준을 거부하니,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같은 반응을 보였다.
특히 서울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Вебер К И )는 을미사변 사건 직후 서울 주재 외교
대표단의 회합을 주선하고,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항의하고 일본 공사가 조선의
국모(國母) 시해사건의 주모자였음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을미사변을 조선인의 소행으로 돌리려던 미우라의 흉계가 실패로 끝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관련자 47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예심 판사 요시오카(吉岡美秀)는 증거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다음해(1896년)
1월 20일 이들을 모두 석방한다.
일본과 김홍집 내각은 악화된 국내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11월 26일(음력 10월 10일)
폐후 조칙을 취소하였다.
장례
폐후 조칙이 취소된 뒤 김홍집 내각을 타도하고 경복궁에 유폐되다시피 한 고종을 구출하여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던 춘생문 사건이 발생하자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5일 만인 12월 1일(음력 10월 15일)에 그 사망을 공식 발표하고 국상을 치르려 했다.
명성황후 장례
이는 고종의 친위 쿠데타 세력인 정동파가 몰락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국상을 치르려 함이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났으며, 그날 고종은 조칙을 내려 김홍집 일파, 곧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을미사적(乙未四賊)이라고 밝히어 역도로 규정하고, 그들이
진행시키던 국모 재간택과 이미 내린 폐비에 관한 조칙을 무효로 돌렸다.
1896년 3월 10일 김홍집 내각이 진행하던 국상 절차를 중단시키고, 무기한 연기하였다.
그 뒤 국상 일정을 몇 차례 더 연기하였다.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 고종이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에 환구단에 나아가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낮 12시에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추존하였다.
이튿날인 10월 13일 아침 황제는 황후의 빈전에 제사를 드리고, 오전 8시에 태극전에 나아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반포하였다.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
평가
고종은 사건 이전에 명성황후의 신변을 염려하여 여러 조치를 취한다. 시위대를
만들었으며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서양인 궁궐 경비원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인 경비원 세레딘사바틴은 폭동이 있으리라는 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받고도 방어 대책을 건의하거나 세우지 않아 고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또한 시위대와 궁궐 경비원들은 사건 당일에도 새벽 2시에 이미 일본군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했으나 안이하게 경비하다가 4시 30분경에야 고종에게 급보를 전했다.
고종은 황후가 안전한 곳에 피신했다고 답변했으나 당시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마땅한 피신처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으리라 여겨진다.
당시 고종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리라는
예상하고 황후를 침전인 옥호루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령합으로 부르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황후를 일반 궁녀와 같은 복장으로 궁녀들과 함께 앉혀 폭도들의 눈을
피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마저 서슴없이 유린하였다.
한편 봉건 군주 국가에서 마땅히 조선의 군대는 왕실 수호와 국토 방위에 헌신해야
함에도 조선 군대인 훈련대 일부는 일본 폭도들의 역모에 가담해 그들의 졸개로
궁궐 침입에 가세했다.
한편 연약한 조선 궁녀들은 일본 폭도들의 폭력과 협박 앞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1500명의 궁궐 경비병은 겁을 먹고 무기와 군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도주해 버렸다.
역사적 평가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보며, 또한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고 여긴다.
또한 대한제국 성립의 한 원인으로 평가한다.
한국의 친일파나 일본의 극우 인사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민비”를
처단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 서구화만을 근대화로 오해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수구·반동으로 여겨서 일으킨 폭거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일본 아사히 TV 보도
2009년 8월 일본 아사히 TV의 "보도 스테이션"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는데, 범인들의 후손중 카와노 타츠미와 이에이리 케이코가 명성황후의 후손을
만나 사죄하는 모습을 담았다.
일본의 일부 극우익 성향의 네티즌들은 "역사 위조, 허위보도"라고 하기도 했으며
"황후를 살해한 것은 조선인들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아사히 TV 보도 이후 전독립기념관 관장 김삼웅은 을미사변에 참여했던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외손자 카와노 타츠미를 만나 개인적인 반성과 용서에 그치지 않고
일본 정부가 반성하고 사죄할 수 있도록 적극 제안해 달라고 요청했다.
명성황후 생존설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2013년 6월 30일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살해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독일과 영국의 외교문서를 찾았다고 밝혔다.
정상수가 찾아낸 외교문서에 따르면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4개월 후인 1896년 2월 6일 러시아
주재 독일대사 후고 라돌린은 독일제국 총리 쉴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게 "명성황후가
살아있으며 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로 피신하려 한다"는 취지의 비밀문서를 보냈다.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2월 15일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윌터 힐리어는 베이징 주재 영국
대리공사 뷰클럭에게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사망 여부에 대해 조선 고종이 말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가 사망했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 4개월 후에는 영국 총영사에게
명성황후의 사망 여부에 대해 침묵한 것이다.
힐리어는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0월 9일 을미사변 당시 궁녀 서너명이 죽었고, 명성황후는
탈출했다는 내용의 보고를 베이징에 보낸 바 있다.
정상수의 발표에 대해 여러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발표했다.
전우용은 정상수가 발굴한 외교자료에 대해 "일본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퍼뜨린 역선전이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독일 외교문서가 신뢰성이 높다는 점은 수긍한다"면서도 이 문서가
아관파천이 일어난 시기와 비슷한 시점에 작성됐다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원한 사람은
왕비가 아니라 왕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강상규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정설에
안주하지 않고 1차 사료를 토대로 치밀한 재검토 작업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