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홍길동전> 사회제도의 모순을 비판하다.
허균(許筠, 1569년 12월 10일(음력 11월 3일) ~ 1618년 10월 12일(음력 8월 24일))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학자이자
작가, 정치가, 시인이었다.
강릉 초당동 허균의 생가
서자를 차별 대우 하는 사회 제도에 반대하였으며, 작품 《홍길동전》이 그의 작품으로 판명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본관은 양천,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또는 학산(鶴山), 성소(惺所), 성수(惺叟)로 불렸고 후에는 백월거사
(白月居士)로도 불렸다.
1594년(선조 2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597년(선조 30년)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여 공주 목사를
거쳤으나 반대자에게 탄핵받아 파면되거나 유배당했다.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불교를
신봉하여 논란을 야기(惹起)하기도 했다.
벼슬은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대북에 가담하여 실세로 활동하
였으나 1617년(광해군 10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으로 가담하였다.
신분제도와 서얼 차별에 항거하려고 서자와 불만하는 계층을 규합하여 혁명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이를 비판하던 기자헌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반역을 도모하려했다는 기준격의 밀고로 능지처참되었다.
그의 문집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모두 인멸(湮滅)될 뻔하였으나 그가
죽음을 예상하고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해줘서 후대에 전래었다.
홍길동전과 성소부부고 등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는 동인이었으며 북인, 대북으로 활동하였다. 초당 허엽의 아들로, 허성의 이복제
(異腹弟)이자 허봉, 허난설헌의 친제(親弟)이다. 우성전은 그의 이복 매부였다. 손곡 이달과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다. 동인의 초대 당수 성암 김효원(金孝元)의 사위이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배경)
허균은 1569년(선조 3년) 음력 11월 3일에 강릉 초당동에서 군수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초당(草堂))의 삼남 삼녀 가운데 말자(末子)로 태어났다. 허균은 부친 초당(草堂)의 둘째 부인인
강릉 김 씨 예조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말자(末子)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許筬)은 그의 이복형이고 우성전의
처가 그의 이복 누나이며, 후에 율곡 이이를 탄핵했다가 송응개 등과 함께 계미삼찬으로 몰려 축출된
허봉과 난설헌(蘭雪軒) 허초희가 각각 동복 형과 누나이다.
그의 부친 초당(草堂)은 사림파의 일원으로, 화담(花潭)의 문하와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한
인물이었다. 부친 초당(草堂)은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고 동인의 영수(領袖)가 되었던 인물로, 한때
강릉의 맑은 물로 초당 두부를 만들었다.
강릉의 물맛으로 특이한 두부를 만들어 초당 두부의 명성은 한성부까지 전래되었으나 초당(草堂)은
관료로서 장사한다고 하여 탄핵받기도 했다. 부친 초당(草堂)은 동인을 창당한 일원 중 한 사람으로,
후일 허균은 동인에서 분리된 북인의 일원이고 북인의 강경파인 대북의 일인으로 활동했다.
허균의 나이 12세인 1580년(선조 13년)에 부친 초당(草堂)이 상주에 있는 객관에서 별세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우다가, 나중에 둘째 형의 벗인 손곡(蓀谷)에게서 배웠다.
서자 출신으로 출세가 어려웠던 손곡(蓀谷)의 처지에 비애를 느끼고 『홍길동전』을 지었다.
허균도 재취 부인의 소생으로 서자와 다름없는 형편이라서 손곡(蓀谷)의 불우(不遇)한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유년기
어릴 적부터 그의 기억력은 비상하였고, 10세 이전의 소년기 때 글을 잘 지어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유몽인(柳夢寅)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역적 허균은 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
면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9세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이 칭찬(稱讚)하며,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 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모 사위 추연(秋淵)만은 그 시를 보고
‘후일 그가 비록 문장에 뛰어난 선비가 되더라도 허씨 문중을 뒤엎을 자도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라고 말했다.
(<어우야담>)
당대 명사였던 추연(秋淵)이 어린아이의 시에서 ‘허씨 문중을 뒤엎을’ 그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허균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허균 자신도 ‘운명을 풀이하는 글’[解命文]에서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
나는 기사년(己巳年·1569, 선조 2년) 병자월(丙子月·11월) 임신일(壬申日·3일) 계묘시(癸卯時)에
태어났다. 성명가(星命家·사주, 관상가)가 이를 보고 ‘신금(申金)이 명목(命木)을 해(害)치고
신수(身數)가 또 비었으니 액(厄)이 많고 가난하고 병이 잦고 꾀하는 여러 일이 이루어지지 않겠다.
그러나 자수(子水)가 중간에 있는 고(故)로 수명이 짧지 않겠고 강수가 맑고 깨끗하여 재주가
대단하겠고 묘금(卯金)이 또 울리므로 이름이 천하 후세에 전하리라’라고 말했다.
나는 그전부터 이 말을 의심해왔으나 벼슬길에 나온 지 17년에서 18년 이래 전패(顚沛)와 총욕
(寵辱)이 반복되는 갖가지 양상이 은연중(隱然中) 그 말과 부합되고 보니 이상하기도 하다.
(<성소부부고.>)
5세 때부터 형 허봉의 벗인 손곡(蓀谷)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9세 때 이미 묘사를 잘하여
시를 잘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외로움을 달래려 더욱 시문 공부에 전념하였다.
첫 스승인 손곡(蓀谷)은 둘째 형의 벗으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았는데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후에 손곡(蓀谷)에게 시와 글을 배우다가 매부추연(秋淵)의 추천으로, 당대 대학자 류성룡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글을 배웠다.
청년기 (초시, 생원시 합격과 임진왜란)
일찍 부친을 여의었으나 20세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이복 형 허성의 집과, 강릉의 외가를 오가며
풍족하지는 않았으나 어렵지 않은 소년기를 보냈다.
그의 나이 17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 초시에 급제하고 안동 김씨 김대섭(金大涉)의 차녀와 혼인한다.
안동 김씨 부인의 친정어머니는 청송 심씨 심전(沈銓)의 딸로, 좌의정 심통원과 영의정 심연원의 종손녀
이자 인순왕후, 심의겸의 6촌 여동생이다.
21세 때인 1589년 생원시에 급제하나 열다섯 살 때 그와 가까웠던 친형 허봉이 이이를 탄핵하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고 김성립(金誠立)에게 출가한 누이 난설헌(蘭雪軒)은 시댁과 불화를 겪고 자식들은
잇달아 세상을 떠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허균이 스무 살 때인 1588년(선조 21년) 허봉은 끝내 서울 땅을 밟지 못하고 금강산에서 병사했다.
생전에 허봉은 허균에게 “온갖 일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어서 높은 재주로도 영락(零落)하여 초망(草莽)을
떠도는구나”(‘아우에게 보냄’, 편지 「하곡집(荷谷集)」을 보냈는데, 형 허봉은 곧 금강산에서 객사하고 만다.
24세 때인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을 피하던 와중에 부인 안동 김씨가 단천에서 첫아들을 낳고 사망하고
어린 아들도 전란 중에 병사한다. 가족을 잃은 허균은 이후 집필에 몰두했는데 외가 애일당 뒷산의 이름을
따서 호 교산(蛟山)을 사용한다.
그 뒤 허균은 선산 김씨로 동인의 초대 당수인 김효원의 딸과 재혼한다. 김효원의 동생이자 후처의 숙부인
김이원은 북인의 중진이었다.